라쇼몽 현상으로 알게 된, 형과 제가 같은 어린 시절을 다르게 기억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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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추석, 오랜만에 형과 술 한잔을 하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부모님이 형만 챙겨주고 저는 뒷전이었다고 늘 생각해왔습니다. 형 생일에는 큰 케이크를 사주면서 제 생일은 대충 넘어갔던 기억, 형이 뭘 사달라고 하면 바로 사주면서 제가 사달라고 하면 나중에 보자며 미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습니다. 그날도 술기운을 빌려 “형은 몰랐겠지만 나는 어릴 때 진짜 서러웠어”라고 털어놨습니다.

그런데 형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형은 오히려 자기가 어릴 때 더 서러웠다고 했습니다.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맏이라고 맨날 양보만 해야 했어. 새 옷도 너 먼저 사주고 나는 물려 입었잖아.”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같은 집에서, 같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는데, 우리 둘 다 자기가 더 서러웠던 쪽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둘 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서로 완전히 다른 기억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세부 내용이 미묘하게 달랐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형의 생일 케이크는 초콜릿 케이크였는데, 형은 그날 딸기 케이크였다고 우겼습니다. 별것 아닌 디테일이었지만, 그마저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는 게 묘하게 신기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남아서 찾아보다가 만난 개념이 ‘라쇼몽 현상’이었습니다.

라쇼몽 현상은 왜 같은 기억을 다르게 만들까

라쇼몽 현상은 같은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 각자의 기억, 감정,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르게 그 사건을 진술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제목에서 유래한 이름인데, 핵심은 이게 누군가 거짓말을 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이 몇 가지 인지 과정이 겹쳐서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람은 자기가 이미 믿고 있는 것에 부합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는 확증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나는 둘째라서 손해 본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고, 그 생각에 맞는 장면들만 유독 선명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형은 반대로 “맏이라서 늘 양보해야 한다”는 서사에 맞는 기억만 붙잡고 있었던 셈이고요.

여기에 자아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도 함께 작동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더 힘들었다고 기억할 때, 자신의 감정과 입장을 정당화하기가 훨씬 쉬워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의 연구에 따르면, 기억은 한 번 저장되면 고정되는 게 아니라 떠올릴 때마다 그 시점의 감정과 상황에 맞춰 조금씩 다시 편집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형은 삼십 년 가까이 각자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에게 더 설득력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다시 그려온 셈입니다.

이 대화를 계기로 저는 회사에서 겪었던 비슷한 일도 떠올랐습니다. 몇 년 전 팀 프로젝트가 엎어졌을 때, 기획팀은 개발팀이 일정을 못 맞췄다고 했고 개발팀은 기획팀이 요구사항을 계속 바꿨다고 서로를 탓했습니다. 회의 때마다 “그때 분명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라는 말이 오갔는데, 신기하게도 양쪽 다 자신이 한 말은 정확히 기억하면서 상대가 한 말은 흐릿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서로 발뺌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그것도 각자 자기 입장에 유리한 기억만 선택적으로 붙잡고 있었던 라쇼몽 현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누가 맞는지 따지는 대신 해본 것

그날 저희는 누구 기억이 맞는지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어느 순간 그게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차피 삼십 년 전 일을 지금 와서 정확히 검증할 방법도 없었고, 무엇보다 둘 다 진심으로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요. 대신 저희는 “그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나는 몰랐던 부분이 있었겠다”는 쪽으로 대화를 바꿔봤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말을 바꾸자마자 분위기가 훨씬 누그러졌습니다. 사실관계를 다투는 대신 서로가 그때 느꼈던 감정 자체를 인정해주니, 삼십 년 묵은 응어리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희 부모님은 그 자리에 함께 계시지 않았지만, 나중에 넌지시 그날 얘기를 여쭤봤습니다. 어머니는 또 다른 기억을 갖고 계셨습니다. “너희 둘 다 그렇게 서운했는지 몰랐다, 엄마 눈에는 둘 다 예뻐서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썼는데”라고 하시더군요. 같은 가족, 같은 시절을 두고도 세 사람이 세 가지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애초에 하나의 완벽한 정답을 찾으려 했던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은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라쇼몽 현상이라는 개념에 비춰 정리한 내용입니다. 누군가와 같은 사건을 두고 기억이 자꾸 어긋난다면, 그건 둘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났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생긴다면, 누구 말이 맞는지 따지기 전에 “그때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다”는 한마디를 먼저 건네보시면 어떨까요. 그 한마디가, 오래된 오해를 푸는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릅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