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 효과 때문에 20년 넘게 그림을 놓아버렸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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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미술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그린 풍경화를 보시던 선생님이 지나가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색 조합 감각이 좀 아쉽네, 그림보다는 다른 걸 해보는 게 어때.” 별 뜻 없이 던진 한마디였을 텐데, 저는 그날 이후로 미술 시간마다 손이 굳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그 뒤로 20년이 넘도록 저는 스스로를 “그림에 소질 없는 사람”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살았습니다. 여행지에서 스케치북을 든 사람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저는 늘 “나는 그런 재능이 없다”며 시도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몇 해 전, 친구의 권유로 취미로 그림을 배우는 원데이 클래스에 억지로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제 그림을 보더니 “색감 조합이 재밌으시네요, 이런 배색은 흔치 않은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순간 얼떨떨했습니다. 초등학교 때 들었던 말과 정반대의 평가였으니까요.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진짜였을까, 아니면 애초에 재능의 문제가 아니었던 걸까 하는 생각에 찾아보다가 만난 개념이 ‘라벨 효과’였습니다. 그날 밤 저는 오랜만에 서랍 깊숙이 넣어뒀던 색연필을 꺼내 다시 종이 위에 선을 그어봤습니다.

라벨 효과는 왜 이렇게 오래 사람을 붙잡을까

라벨 효과란 누군가 나에게 붙인 꼬리표를 나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꼬리표에 맞춰 행동과 자기 인식이 굳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사람의 뇌는 세상의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타인을 빠르게 규정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문제는 이 라벨이 한번 붙으면 그 뒤로 확증편향이라는 인지 과정이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다”는 라벨을 받아들인 저는, 그 뒤로 제가 그린 그림에서 부족한 부분만 유독 크게 보였고, 우연히 잘 그려진 부분은 그냥 운이 좋았다고 넘겨버렸습니다. 반대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볼 때마다 “역시 저 사람은 원래 재능이 있는 거고, 나는 아니다”라는 생각만 확인하고 강화했습니다. 결국 20년 동안 저는 제 그림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해볼 기회 자체를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이 현상은 부정적인 라벨에서 특히 강력하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낙인 효과라고 부르는데, 한번 부정적인 꼬리표가 붙으면 당사자가 그 정체성을 점점 내면화하면서 실제로 그 꼬리표에 맞는 모습으로 굳어져 간다는 이론입니다. 반대로 교육심리학에서 말하는 피그말리온 효과는 긍정적인 기대와 믿음을 받은 사람이 실제로 그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성장한다는 개념입니다. 같은 원리가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셈인데, 저는 이 두 개념을 알고 나서야 초등학교 때의 그 한마디가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저를 붙잡고 있었는지 실감하게 됐습니다.

같은 그림, 정반대의 라벨

돌이켜보면 초등학교 선생님과 최근 만난 선생님이 본 건 결국 같은 종류의 그림이었을 겁니다. 색감을 다소 과감하게 쓰는 제 특유의 방식이요. 그런데 한쪽은 그걸 ‘아쉬운 감각’으로 규정했고, 다른 한쪽은 ‘흔치 않은 개성’으로 규정했습니다. 같은 특징을 두고 완전히 다른 이름표가 붙은 겁니다. 저는 그중 하나의 라벨만을 20년 넘게 진실이라 믿고 살아온 셈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 제가 얼마나 많은 걸 시도조차 안 해보고 포기해왔을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스스로에게 다르게 말하기 시작한 것들

그 뒤로 저는 제 안에 붙어 있던 다른 오래된 라벨들도 하나씩 의심해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원래 낯을 많이 가린다”, “나는 요리에 재주가 없다” 같은 말들을 스스로에게 무심코 반복해왔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이제는 뭔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원래 그래”라는 말 대신 “이번엔 이 부분이 서툴렀다”로 바꿔 말해보려 합니다. 별것 아닌 말버릇의 차이 같지만, 이렇게 바꾸고 나니 새로운 시도 앞에서 덜 움츠러들게 됐습니다.

회사에서 후배들을 대할 때도 이 경험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예전에는 실수한 후배에게 “너는 왜 이렇게 덤벙대냐”는 식으로 사람 자체를 규정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썼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 말이 후배에게 초등학교 시절 저의 그 한마디처럼 오래 남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에, “이번 보고서에서 이 부분이 아쉬웠다”처럼 행동과 상황만 짚어주려고 신경 씁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 사람의 다른 강점을 먼저 짚어준 뒤에 아쉬운 점을 이야기합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후배들의 반응이 확실히 달라지는 걸 느낍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은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라벨 효과라는 개념에 비춰 정리한 내용입니다. 어릴 때 무심코 들은 말 한마디가 몇 년, 몇십 년 동안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두는 라벨이 될 수 있다는 걸 저는 뒤늦게 알았습니다. 혹시 지금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오래 믿어온 게 있다면, 그게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누군가 무심코 붙인 오래된 이름표는 아니었는지 한번 다시 들여다봐 주시면 어떨까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