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효과 덕분에 슬라이드 한 장만 기억에 남았던 발표 이야기

고립효과-설명-사진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몇 달 전 분기 실적 발표를 준비하면서 있었던 일입니다. 서른 장 가까이 되는 슬라이드를 만들었는데, 다 비슷한 흰 배경에 파란 글씨체로 통일해서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딱 한 장, 이번 분기 핵심 성과를 보여주는 슬라이드만 실수 아닌 실수로 배경색을 진한 남색으로 바꿔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전체 디자인을 통일할 계획이었는데, 시간에 쫓겨 그 한 장만 미처 수정하지 못한 채 발표해버린 것이었습니다. 발표 직전까지도 “이것만 급하게 다시 손봐야 하나” 고민했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그냥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며칠 뒤, 임원 한 분이 복도에서 저를 마주치더니 “그 남색 배경 슬라이드에 있던 숫자, 정말 인상적이더라”며 구체적인 내용까지 짚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서른 장 중에서 유독 그 한 장, 심지어 실수로 다르게 만든 그 슬라이드 내용만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른 슬라이드 내용은 거의 언급이 없었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알게 된 개념이 ‘고립 효과’였습니다.

고립 효과는 왜 튀는 것 하나만 기억에 남길까

고립 효과는 비슷한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을 때, 그중 눈에 띄게 다른 하나가 나머지보다 훨씬 더 잘 기억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1930년대 한 심리학자가 처음 연구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여러 항목을 순서대로 보여주면서 그중 하나만 색깔이나 형태를 다르게 했더니, 나중에 그 항목을 기억하는 비율이 다른 항목들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 뇌가 정보를 처리할 때 상대적인 대비에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슷한 것들이 계속 이어지면 뇌는 그 정보를 하나의 흐름으로 뭉뚱그려 처리하면서 별도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흐름 속에서 갑자기 다른 무언가가 나타나면, 뇌는 그것을 예외적인 신호로 인식하고 훨씬 더 집중해서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제 발표에서도 스물아홉 장의 흰 배경 슬라이드가 이어지는 동안 청중의 집중력은 서서히 흐트러졌을 텐데, 갑자기 나타난 남색 배경이 다시 시선을 확 붙잡았던 셈입니다.

이 원리를 처음 발견한 심리학자의 이름을 따서, 학계에서는 이 현상을 폰 레스토프 효과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단어와 숫자가 섞인 목록을 외우게 했는데, 대부분 검은 글씨로 나열된 목록 중 딱 하나만 빨간색으로 표시하자, 나중에 그 항목을 기억해내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건 이 효과가 단순히 색깔뿐 아니라 크기, 글씨체, 배치 순서가 달라져도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 핵심은 ‘눈에 띄는 차이’ 그 자체였던 셈입니다.

의도치 않게 얻은 효과, 이번엔 의도적으로 써보기

이 일을 겪고 나서, 저는 다음 발표부터 이 원리를 의도적으로 활용해보기로 했습니다. 정말 강조하고 싶은 핵심 슬라이드 딱 한두 장만 색이나 레이아웃을 다르게 만들고, 나머지는 최대한 통일된 디자인을 유지했습니다. 효과는 확실했습니다. 발표가 끝난 뒤 사람들이 기억하는 내용은 대부분 그 강조된 슬라이드에 담긴 정보였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슬라이드를 다 예쁘게 꾸미려고 애썼는데, 오히려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이력서를 다시 쓸 때도 이 원리를 적용해봤습니다. 예전에는 모든 경력 사항을 비슷한 굵기와 크기로 나열했는데, 이번엔 가장 자신 있는 프로젝트 하나만 굵은 글씨와 다른 색으로 눈에 띄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면접에서 면접관이 그 부분을 콕 짚어 질문했는데, 나머지 경력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았습니다. 이력서 전체를 화려하게 꾸미기보다, 딱 하나를 도드라지게 만드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너무 자주 쓰면 오히려 효과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다만 이 방법을 쓰면서 한 가지 주의할 점도 배웠습니다. 강조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고립 효과가 사라진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번은 욕심을 내서 슬라이드 다섯 장을 각기 다른 색으로 강조했는데, 그러자 어떤 것도 특별히 튀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산만한 발표가 되어버렸습니다. 진짜 중요한 한두 가지만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통일해야,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제대로 도드라진다는 걸 그 실패를 통해 배웠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은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고립 효과라는 개념에 비춰 정리한 내용입니다. 무언가를 사람들 기억에 남기고 싶다면, 모든 걸 다 강조하려 애쓰기보다 정말 중요한 한 가지만 다르게 만들어보는 게 훨씬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다음번 발표나 보고서를 준비하실 때, 서른 장 중에 딱 한 장만 남기고 싶은 슬라이드를 먼저 정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저는 요즘도 발표 자료를 만들 때마다, 그 우연히 남았던 남색 슬라이드를 떠올리며 딱 하나의 강조점부터 먼저 정합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