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핸디캐핑,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습니다

셀프 핸디캐핑을 표현한 섬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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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회사가 바빠서 공부를 거의 못 했어.”

시험을 열흘쯤 앞두고 제가 동료에게 한 말입니다. 사실이긴 했습니다. 그 주에 야근이 세 번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게 좀 이상했습니다. 공부를 못 했으면 불안해야 정상인데, 저는 그 반대였거든요.

셀프 핸디캐핑은 시험 2주 전에 시작됐습니다

자격증 시험을 하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회사에서 있으면 좋다고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도전이었습니다.

시험을 2주 남기고 제가 뭘 했느냐면, 책상을 정리했습니다. 서랍을 다 빼서 볼펜을 종류별로 나누고, 몇 년 묵은 명함을 버리고, 스탠드 위치를 바꿨습니다. 그다음 날에는 문제집을 새로 한 권 샀습니다. 이미 있는 걸 반도 안 풀었는데요. 그리고 며칠은 공부법 영상을 봤습니다. 공부는 안 하고 공부하는 법을 봤습니다.

그때는 이걸 다 준비라고 생각했습니다. 환경을 갖추고 자료를 보완하고 방법을 점검하는 일이라고요. 돌아보니 저는 2주 동안 공부만 빼고 다 했습니다.

이상한 건 그 시간이 꽤 즐거웠다는 겁니다. 서랍을 정리하고 나면 뭔가 진척이 있는 기분이 들었고, 새 문제집을 펴면 이번엔 다르겠다 싶었습니다. 공부를 붙잡고 앉아 있을 때보다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가벼움이 신호였는데, 그때는 그게 순조롭다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실패의 변명을 미리 만들어두는 일

나중에 알게 된 이름이 셀프 핸디캐핑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 핸디캡을 씌운다는 뜻입니다.

핵심은 실패했을 때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만들어두는 것입니다. 준비를 제대로 못 한 상태로 시험을 보면, 떨어져도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가 됩니다. 자존심에 금이 덜 갑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붙으면 “그 상황에서도 해냈다”가 되니 이득이 더 커집니다. 어느 쪽으로 굴러도 손해가 아닌 구조입니다.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하나는 실제로 방해물을 만드는 쪽입니다.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거나, 준비할 시간을 다른 데 써버리거나, 저처럼 책상을 정리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말로 깔아두는 쪽입니다. “어제 한숨도 못 잤어”, “나 이거 처음 해봐” 같은 말을 시작 전에 미리 해두는 겁니다.

문제는 이게 실제로 결과를 나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변명을 만들려고 준비를 덜 하니 성적이 떨어지고, 떨어진 성적이 다시 변명의 필요를 키웁니다. 그리고 이게 반복되면 어느 순간 습관이 됩니다.

여기서 미루는 행동과 헷갈리기 쉬운데, 결이 조금 다릅니다. 미루는 건 불안한 일을 뒤로 밀어두는 쪽이고, 셀프 핸디캐핑은 실패했을 때 쓸 핑계를 미리 준비해두는 쪽입니다. 겉모습은 비슷한데 목적이 다른 셈입니다.

변명이 준비돼 있으면 실패가 덜 아픕니다

시험은 떨어졌습니다. 두 번째였고요.

그날 저녁에 아내가 결과를 물었습니다. 저는 “이번엔 진짜 시간이 없었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그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입니다.

떨어졌으면 속이 상해야 하는데 저는 안도하고 있었습니다. 준비된 문장이 있었으니까요. 2주 전부터 만들어둔 문장이요. 그때 알았습니다. 저는 시험을 준비한 게 아니라 떨어졌을 때 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두 번을 떨어졌는데 두 번 다 같은 말을 했다는 것도 그제야 보였습니다. 첫 번째 때도 회사가 바빴다고 했었거든요. 회사는 늘 바빴고 앞으로도 바쁠 텐데, 그렇다면 저는 계속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셈이었습니다.

아내는 별말 없이 “고생했어” 하고 넘어갔습니다. 저는 그 반응이 좀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서운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위로받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제 변명이 받아들여지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거니까요.

변명을 미리 깔아두는 걸 그만두고 나서

가장 먼저 바꾼 건 말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꼭 한마디를 붙였습니다. “이거 오랜만이라 잘 못해요”, “준비를 많이 못 했는데”. 요즘은 그 말이 나오려고 하면 삼킵니다. 처음엔 벌거벗은 기분이었습니다. 방패를 놓고 나가는 느낌이요. 그런데 몇 번 해보니 별일이 없었습니다. 못하면 그냥 못하는 거였고, 아무도 저만큼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준비 시간을 앞으로 당긴 겁니다. 예전엔 시험 2주 전부터 뭔가를 시작했는데, 그 시기가 딱 제가 딴짓을 하기 시작하는 때더군요. 시간이 빠듯해야 변명이 성립하니까요. 지금은 넉넉하게 잡아서 시작합니다. 시간이 남으면 핑계 댈 거리가 없어져서, 오히려 그게 저를 붙잡아둡니다.

세 번째는 좀 사소한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공부하기 전에 책상을 정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질러진 채로 그냥 앉습니다. 정리는 끝나고 합니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제 경우엔 그 정리하는 시간이 딴짓의 출발점이었습니다. 볼펜을 나누다 보면 서랍을 열게 되고, 서랍을 열면 버릴 것이 보이고, 그러다 보면 한 시간이 갑니다. 시작을 막으니 그 줄이 통째로 사라졌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새 문제집을 사고 싶어지면 일주일을 기다립니다. 일주일 뒤에도 사고 싶으면 그때 삽니다. 대체로 그 사이에 마음이 식더군요. 사고 싶었던 게 문제집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던 겁니다.

세 번째는 아직입니다

시험은 올해 다시 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회사가 바쁘든 안 바쁘든 그 말을 안 하려고 합니다. 떨어지면 준비가 부족했던 걸로 두려고요. 그게 훨씬 아프겠지만, 두 번 떨어지고 두 번 같은 말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겁니다.

혹시 시험이나 발표를 앞두고 갑자기 방 청소가 하고 싶어지신다면, 한 번쯤 멈춰서 물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지금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중에 할 말을 만들고 있는 건지요.

이 글은 제가 겪은 일을 정리한 내용이며,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여기 나온 개념은 사람의 행동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니 자신이나 타인을 단정하는 근거로 쓰지 마시고, 반복되는 회피나 무기력으로 오래 힘드시다면 전문가와 상담해보시길 권합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