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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저희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에서 경비원 근무 시간을 줄이는 안건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다. 관리비 절감을 이유로 야간 경비를 축소하자는 내용이었는데, 회의실에 모인 주민 스무 명 가까이가 그 안건을 듣고도 별다른 반대 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저도 속으로는 “야간에 경비가 줄면 좀 불안할 것 같은데”라고 생각했지만, 다들 조용히 있는 걸 보고 저만 유별나게 구는 건가 싶어 입을 다물고 있었습니다. 옆에 앉은 이웃분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있었는데, 그때는 그 모습이 찬성의 표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회의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한 주민 한 분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사실 좀 불안한데, 다른 분들은 다 괜찮으신가요?” 그 한마디가 나오자마자 회의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들 걱정하고 계셨을 것 같아요”라는 말이 쏟아졌습니다. 심지어 아까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던 그 이웃분도 “저도 사실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라며 손을 들었습니다. 결국 그 안건은 다시 논의하기로 결정됐습니다. 저는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도대체 우리는 왜 그렇게 오랫동안 다들 같은 생각을 하면서도 침묵하고 있었던 건지 궁금해졌고, 찾아보다가 알게 된 개념이 ‘다원적 무지’였습니다.
다원적 무지는 왜 다들 같은 생각을 침묵으로 감추게 만들까
다원적 무지란 실제로는 여러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각자 “나만 이렇게 생각하나 보다”라고 착각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회의실에서 저를 포함한 많은 주민들이 속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침묵을 보고 서로 “다들 괜찮은가 보다”라고 잘못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국 실제 여론과, 사람들이 인식하는 여론 사이에 커다란 착각의 간극이 생겨버린 셈이었습니다.
이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타인의 진짜 속마음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만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표정이나 침묵 같은 제한된 단서만으로 “저 사람은 찬성하는구나”라고 넘겨짚기 쉽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다른 주민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며 다들 별 이견이 없나 보다 생각했는데, 사실은 다들 저와 똑같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집단에서 혼자 튀는 의견을 냈다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두려운 마음이, 결국 다수가 똑같이 침묵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던 셈입니다.
이 개념을 찾아보다가 비슷한 원리가 위급 상황에서도 나타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누군가 쓰러졌을 때, 오히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각자 주변 사람의 반응을 살피다가, 다들 가만히 있으니 “심각한 상황은 아닌가 보다”라고 잘못 판단해버리는 것입니다. 저희 아파트 회의도 규모만 작았을 뿐 똑같은 구조였습니다. 다들 서로의 무반응을 보고 “별일 아닌가 보다”라고 판단했고, 그 판단들이 모여 아무도 나서지 않는 침묵의 벽을 만들었던 셈입니다.
한 사람의 말이 왜 그렇게 큰 파장을 일으켰을까
그 회의에서 인상 깊었던 건, 딱 한 사람의 발언이 순식간에 분위기를 뒤집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다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나”라는 착각 속에 갇혀 있었는데, 누군가 먼저 속마음을 꺼내자 나머지 사람들도 “사실 나도 그랬다”며 안심하고 동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침묵의 벽에 작은 균열을 내는 순간, 그 뒤에 숨어 있던 나머지 사람들의 생각이 한꺼번에 드러난 셈이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다수의 침묵이 꼭 다수의 동의를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곁에서 실천해본 작은 습관
이 경험 이후로 저는 어떤 모임에서든 다들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때, 한 번쯤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신 분 계신가요?”라고 먼저 물어보려 합니다. 별거 아닌 질문 같지만, 그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침묵을 깰 용기를 주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날 배웠기 때문입니다. 또 회의나 모임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는 손을 들어 발표하는 방식 대신, 익명으로 의견을 적어 내는 방식을 제안해보기도 합니다. 실제로 다음 입주자 회의에서는 안건별로 익명 쪽지 투표를 도입했는데, 예전보다 훨씬 다양한 의견이 나왔습니다.
회사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예전 팀에서 야근이 너무 잦다는 불만이 다들 있었는데, 정작 회의 시간에는 아무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저도 “다들 이 정도는 버티나 보다”라고 생각하며 참았는데, 나중에 회식 자리에서 취기를 빌려 한 동료가 “이거 진짜 너무 힘든 것 같아요”라고 털어놓자, 순식간에 다들 맞장구를 치며 그동안 눌러왔던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그날 이후로 팀 회의 방식이 조금씩 바뀌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는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이것도 똑같은 심리였던 셈입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은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다원적 무지라는 개념에 비춰 정리한 내용입니다. 모두가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닐 수 있습니다. 혹시 어떤 자리에서 다들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다면, 그 침묵 뒤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꺼내보는 것, 혹은 누군가에게 먼저 물어봐 주는 것이 생각보다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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