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한 날, 저를 사흘 동안 붙잡은 건 금액이 아니었습니다

친구-섬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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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밤 열한 시였습니다.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 뜬 건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 이름이었습니다. “자냐?” 그 두 글자 뒤에 무슨 말이 이어질지, 저는 이상하게도 읽기 전부터 알 것 같았습니다.

500만 원이었습니다. 석 달만 쓰고 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사흘 동안 답장을 못 했습니다

못 빌려줄 돈은 아니었습니다. 그게 더 곤란했습니다. 없다고 하면 간단한데, 있으면서 안 준다는 건 다른 문제니까요.

아내에게 말했더니 이렇게 답했습니다. “빌려줄 거면 못 받는 셈 치고 줘. 그게 안 되면 지금 거절해.”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대로 하는 게 안 됐습니다. 못 받는 셈 치기엔 500만 원이 컸고, 거절하기엔 그 친구가 컸습니다.

토요일이 지나고 일요일이 지났습니다. 읽음 표시는 이미 떠 있었습니다. 답장을 안 하는 것도 답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흘 동안 제가 계산기를 두드린 건 500만 원이 아니었습니다. 답장을 보내는 순간 이 친구와의 10년이 다른 종류의 관계로 바뀐다는 예감, 그게 저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돈이 오가면 관계의 규칙이 바뀝니다

심리학에서는 사람 사이의 주고받음을 크게 두 가지 규범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사회 규범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 규범입니다.

사회 규범은 가족이나 오랜 친구 사이에서 작동합니다. 여기서는 계산을 하지 않는 것이 규칙입니다. 밥을 몇 번 샀는지 세지 않고, 도와준 것을 언제까지 갚아야 하는지 정하지 않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대신 따뜻합니다. 시장 규범은 반대입니다. 금액과 기한과 조건이 분명합니다. 차가운 대신 공정하고, 서로에게 빚진 기분을 남기지 않습니다.

문제는 두 규범이 한 관계 안에 나란히 있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사회 규범으로 굴러가던 관계에 시장 규범이 한번 들어오면, 다시 원래대로 되돌리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설명됩니다. 금액과 날짜가 등장하는 순간 그동안 세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세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세기 시작한 것을 다시 안 세는 상태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더 까다로운 건 두 사람이 같은 규범을 쓰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입니다. 한쪽은 여전히 사회 규범 안에서 “친구니까 도와주는 것”이라 여기는데, 다른 한쪽은 이미 시장 규범으로 넘어가 “언제까지 얼마”를 계산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다툼은 대개 돈을 못 갚아서가 아니라 이 어긋남에서 시작된다고 합니다. 갚는 쪽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빌려준 쪽은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느끼니까요.

친구 사이의 돈 문제가 유독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건 액수가 아닙니다. 그 관계를 어느 규범으로 운영할 것인지를 다시 정해야 한다는 것, 그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걸 상대와 말로 맞춰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손실 회피가 거절을 더 어렵게 만들 때

사람은 무언가를 얻는 기쁨보다 같은 것을 잃는 고통을 더 크게 느낀다고 합니다. 손실 회피라고 부르더군요.

이 말을 알고 나니 제 사흘이 조금 설명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두 개의 손실 사이에 앉아 있었던 겁니다. 빌려주면 돈을 잃을 수 있고, 거절하면 친구를 잃을 것 같았습니다. 어느 쪽을 골라도 잃는 쪽이니 고르는 일 자체가 힘들었던 거고요.

이럴 때 사람이 흔히 하는 선택이 “고르지 않기”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흘 동안 답장을 안 한 건 고민한 게 아니라 결정을 미룬 것에 가까웠습니다.

지나고 나서 알았는데, 미루는 동안 상황이 조용히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첫날 거절했다면 그건 판단이었을 텐데, 사흘을 끌고 나서 거절하면 “고민 끝에 안 되겠다”가 아니라 “재다가 안 줬다”가 됩니다. 반대로 사흘 만에 빌려주면 흔쾌히 준 게 아니라 못 이겨서 준 게 됩니다. 미루는 것이 중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동안에도 시간은 한쪽으로 계속 기울고 있었습니다.

호혜성이라는, 적어두지 않은 장부

사흘째 되던 밤에 제가 뭘 하고 있었는지 말씀드리면 좀 부끄럽습니다. 그 친구가 저한테 뭘 해줬는지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이사하던 날 이틀 휴가를 내고 와줬던 것. 결혼식 사회를 봐줬던 것.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 병원에 제일 먼저 왔던 것. 저는 그걸 하나씩 세고 있었습니다.

사회 규범 안에서는 이런 걸 세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저도 그동안 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돈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없던 장부가 저절로 펼쳐졌습니다. 아직 아무 결정도 하지 않았는데, 제 안에서는 이미 규범이 바뀌어 있었던 겁니다. 그걸 알아차린 게 사흘 중 가장 불편한 순간이었습니다.

시장 규범으로 넘기지 않으려고 제가 포기한 것

예전의 저였다면 그냥 빌려주고 속으로 셌을 겁니다. 몇 년 전 후배에게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돈은 다 받았는데 그 뒤로 만나면 어딘가 데면데면했습니다. 받을 건 다 받았는데 뭔가를 잃은 기분이었죠. 그때는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이번엔 액수부터 바꿨습니다. 500만 원이 아니라 300만 원을 보냈습니다. 아내 말대로 “못 받는 셈 쳐도” 제가 괜찮을 수 있는 선이 거기까지였거든요. 모자란 만큼은 미안하다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빌려주는 쪽이 미안하다고 하는 게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그 말을 하고 나니 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기한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석 달”이라는 말을 제 입으로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날짜를 못 박는 순간 그날부터 저는 달력을 보게 되고, 친구는 제가 달력을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 대신 여유 될 때 주라고만 했습니다. 관계를 시장 규범 쪽으로 넘기지 않으려면 제가 포기해야 하는 게 그 날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얘기를 메신저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주말에 만나서 밥을 먹었고, 돈 얘기는 5분만 하고 나머지는 다른 얘기를 했습니다.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달에 그 친구가 먼저 전화해서 밥 먹자고 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저는 “돈 얘기 하려나” 하고 긴장했을 텐데, 이번엔 그러지 않았습니다. 기한을 안 정한 게 그 긴장까지 같이 없애준 것 같습니다.

정답이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제 방식이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절이 맞는 상황도 많고, 오히려 조건을 분명히 적어두는 편이 서로에게 나은 관계도 있습니다. 금액이 더 컸다면 저도 다르게 했을 겁니다.

다만 사흘 동안 저를 붙잡고 있던 게 500만 원이 아니라 규범이었다는 걸 알고 나니, 결정 자체는 오히려 쉬워졌습니다. 제가 정해야 했던 건 빌려줄지 말지가 아니라, 이 관계를 앞으로 어느 규칙으로 운영할 것인지였으니까요.

이 글은 제가 겪은 일을 정리한 내용이며, 여기 나온 개념들은 사람의 판단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금전 문제는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답이 크게 달라지니 제 사례를 그대로 따르지 마시고, 관계나 감정 문제로 오래 힘드시다면 전문가와 상담해보시길 권합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