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어그램 9번, 가장 무던한 아버지가 3년 만에 처음 언성을 높이신 날

에니어그램 9번 아버지를 묘사한 섬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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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래서 그 집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좀 더 보자.”

3년 동안 같은 질문을 드렸고, 3년 동안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남기신 시골집 이야기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은 지 오래됐고, 지붕은 손볼 때를 놓쳤고, 재산세는 매년 꼬박꼬박 나갑니다. 형은 팔자고 했습니다. 저도 파는 쪽이었습니다. 아버지만 늘 “좀 더 보자”셨습니다.

3년째 “좀 더 보자”만 하시던 아버지

처음엔 아쉬우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나고 자란 집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한 건, 아버지가 그 집을 그리워하는 말씀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겁니다. 사진을 꺼내 보시지도 않았고, 한번 다녀오자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저 결정하는 자리에만 오시면 말수가 줄었습니다.

형이 부동산에 매물로 내놓자고 했을 때도, 제가 수리해서 세를 주자고 했을 때도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그것도 방법이지.” 그런데 다음 주가 되면 아무것도 진행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하신 적이 없으니 따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게 제일 답답했습니다. 화를 낼 대상이 없는 답답함이었습니다.

명절에 형과 둘이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도대체 뭘 원하시는 거냐고. 형이 재떨이를 털면서 말했습니다. “몰라. 물어봐도 늘 괜찮다고만 하시잖아.” 그 말이 오래 걸렸습니다. 괜찮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하시는데, 우리 중 누구도 아버지가 뭘 원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에니어그램 9번은 왜 결정 앞에서 멈춰 서는가

에니어그램에서 9번은 흔히 평화주의자로 불립니다. 아홉 개 유형은 머리·가슴·장이라는 세 중심으로 묶이는데, 9번은 본능을 다루는 장 중심에 속합니다. 이 중심에 놓인 유형들은 저마다 분노를 다르게 처리합니다. 8번이 분노를 밖으로 밀어낸다면, 9번은 그 감정을 감지하는 안테나 자체를 낮춰버리는 쪽에 가깝다고 설명됩니다.

문제는 이 안테나가 분노만 골라서 낮추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불편함을 덜 느끼려다 보면 원하는 것도 함께 흐려집니다. 그래서 9번 성향이 강한 사람은 “나는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말하는데, 그게 진심 어린 배려일 때도 있지만 정말로 자기 선호가 잘 잡히지 않는 상태일 때도 있다고 합니다.

결정을 미루는 것도 게으름과는 결이 다르게 설명됩니다. 선택을 하는 순간 누군가는 실망하고, 그 실망은 관계에 금을 냅니다. 9번이 가장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그 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결정을 못 하는 게 아니라, 결정하지 않음으로써 지금의 평온을 하루라도 더 붙잡아두는 쪽을 택합니다.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그들에게는 가장 안전한 상태인 셈입니다. 주변에서 보기에 우유부단함으로 읽히는 행동이, 안에서는 지키는 행동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화를 지키려다 자기 자리가 지워질 때

지난봄이었습니다. 형이 이제는 정말 정리하자며 인감 이야기를 꺼냈고, 서류를 어디서 떼야 하는지까지 오가던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가 처음으로 소리를 지르셨습니다.

“내가 언제 판다고 했냐.”

제가 기억하는 한 아버지가 언성을 높이신 건 손에 꼽습니다. 형도 저도 굳어버렸습니다. 어머니가 물컵을 내려놓는 소리만 났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너희 둘이서 다 정해놓고, 나한테는 도장만 찍으라는 거잖아.”

저는 그제야 짐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지키려던 건 집이 아니었습니다. 형과 제가 각자 계산기를 두드리며 조금씩 멀어지는 걸, 아버지는 3년 내내 보고 계셨던 겁니다. 팔면 돈이 나뉘고, 돈이 나뉘면 말이 생깁니다. 아버지는 그 말이 시작되는 날을 미루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다만 그걸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좀 더 보자”로만 말씀하셨던 거고요.

에니어그램 9번의 침묵을 다르게 듣게 된 뒤

그날 이후로 아버지께 여쭙는 방식을 바꿨습니다. 예전에는 “파실 거예요, 안 파실 거예요?”처럼 답이 둘 중 하나인 질문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글쎄”로 넘어가셨습니다. 요즘은 “이 집이 정리되면 뭐가 제일 걱정되세요?”라고 여쭙습니다. 결정을 요구하지 않는 질문이니까요. 처음엔 또 웃고 마셨는데, 세 번째쯤 여쭸을 때 “느이 형이 서운해할까 봐”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3년 만에 처음 들은 진짜 이유였습니다.

형과 상의하는 자리도 아버지 앞에서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아버지를 앉혀두고 형과 제가 안건을 정리했습니다. 그게 의견을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입장에서는 두 사람이 이미 합의한 결론 앞에 혼자 앉아 계신 자리였을 겁니다. 지금은 형과 먼저 두 가지 안을 만들어두고, 아버지껜 따로 시간을 내서 하나씩 말씀드립니다. 답을 그 자리에서 받지 않고 며칠 두고 옵니다. 진행 속도는 확실히 느려졌는데, 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주시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 자신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회의에서 제가 “저는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라고 말할 때가 꽤 많았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정말 괜찮았던 적도 있지만, 반대하면 분위기가 상할 것 같아 삼킨 적이 더 많았습니다. 요즘은 괜찮다는 말이 나오려고 하면 한 번 멈춥니다. 그리고 “저는 A가 조금 더 낫다고 봅니다. 다만 강하게 주장할 정도는 아닙니다”까지 말해봅니다. 세기를 붙여서 말하면 반대가 공격으로 들리지 않더군요. 그 뒤로 회의가 끝나고 혼자 억울해하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유형은 사람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정말 에니어그램 9번인지 저는 모릅니다. 검사를 받아보신 적도 없고, 제가 판단할 일도 아닙니다. 다만 9번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난 뒤로 아버지의 “좀 더 보자”가 회피가 아니라 나름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지키는 말로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정도가 제가 얻은 전부입니다.

시골집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대신 형과 저는 각자 얼마를 원하는지 먼저 정리해서 아버지께 보여드렸습니다. 아버지가 제일 무서워하시던 부분을 먼저 치워드린 셈입니다. 지난달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부동산에 한번 물어나 볼까”라고 하셨습니다.

이 글은 제가 곁에서 지켜본 경험을 정리한 내용이며, 에니어그램은 개인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유형을 근거로 가족이나 동료의 행동을 단정하지 않으시길 권합니다. 가족 관계나 감정 문제로 오래 힘드시다면 전문가와 상담해보시길 권합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