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폴트 효과 때문에 5년째 비싼 요금제를 그대로 쓰고 있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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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우연히 통신사 앱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5년째 쓰고 있던 요금제보다 데이터는 더 많이 주면서 월 1만 원 넘게 저렴한 요금제가 버젓이 있었던 겁니다. 그동안 저는 매달 청구서를 볼 때마다 “요즘 통신비 왜 이렇게 비싸지” 하고 투덜거리기만 했지, 정작 요금제를 바꿔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한 건, 막상 바꾸려고 앱을 켜니 클릭 몇 번이면 끝나는 일이었다는 겁니다. 5분도 안 걸렸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5년 동안 이 간단한 걸 안 하고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처음 가입할 때 영업사원이 추천해준 요금제를 그대로 쓰고 있었을 뿐, 특별히 그 요금제를 원해서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처음 설정된 대로 5년을 흘려보낸 셈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찾아보게 된 개념이 ‘디폴트 효과’였습니다.

디폴트 효과가 우리의 선택을 지배하는 이유

디폴트 효과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처음 정해진 기본 옵션을 그대로 따르려는 심리적 경향을 말합니다. 인간의 뇌는 하루에 쓸 수 있는 인지적 에너지가 한정되어 있어서, 여러 대안을 일일이 비교하고 검토하는 수고로움을 본능적으로 피하려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두 가지 심리가 더 얽혀 있습니다. 하나는 현상 유지 편향으로, 현재 상태를 바꿀 때 얻는 이익보다 바뀌는 과정에서 겪을지 모르는 불편함을 과도하게 크게 느끼는 심리입니다. 다른 하나는 손실 회피 성향으로, 같은 크기라도 얻는 기쁨보다 잃는 고통을 훨씬 크게 느끼는 경향입니다. 저는 요금제를 바꾸면 아낄 수 있는 돈보다, 혹시 바꿨다가 서비스가 나빠지거나 절차가 복잡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더 크게 작동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결국 이미 주어진 기본값은 뇌 입장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도피처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 디폴트 효과가 개인의 소비 습관을 넘어 사회 제도에도 그대로 활용된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장기기증 제도입니다. 신청한 사람만 기증자로 등록하는 방식과, 모든 국민을 기본적으로 기증 동의자로 간주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만 별도로 거부 신청을 하게 하는 방식은 결과가 크게 다르다고 합니다. 후자의 방식을 택한 국가들은 기증 동의율이 훨씬 높게 나타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그냥 기본값이 바뀌었을 뿐인데 결과가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이 사례를 보면서 저는, 제가 5년간 비싼 요금제를 유지한 것도 결국 제 의지나 판단의 문제라기보다 그냥 처음 설정된 기본값을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간 결과였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습니다.

5분의 귀찮음이 5년을 지배했던 이유

저는 이 개념을 알고 나서 제 지난 5년을 다시 돌아봤습니다. 사실 요금제를 바꾸는 일은 정말 별것 아니었습니다. 앱 켜고, 요금제 목록 보고, 원하는 걸 선택하면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5분의 수고로움이,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달 만 원 넘는 돈을 그냥 흘려보내게 만든 셈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비슷한 일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몇 년째 쓰지도 않으면서 자동으로 결제되던 구독 서비스, 처음 가입한 은행 앱의 기본 알림 설정, 이사 온 지 3년이 넘도록 한 번도 바꾸지 않은 보험 특약까지, 다 제가 특별히 원해서 유지한 게 아니라 그냥 처음 그렇게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두고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가장 뜨끔했던 건 퇴직연금이었습니다. 회사에서 가입해준 퇴직연금 계좌를 몇 년째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고 있었는데, 확인해보니 수익률이 거의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별도로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예전에는 그냥 낮은 금리 상품에 방치되는 구조였다고 하더군요. 최근에는 가입자가 지시를 안 해도 미리 지정된 상품으로 자동 운용되도록 기본값 자체를 바꾼 제도가 생겼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결국 제도를 만드는 쪽에서 기본값을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저 같은 사람들의 노후 자산이 방치되기도 하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굴러가기도 하는 셈이었습니다.

곁에서 실천해본 작은 습관

그 뒤로 저는 매년 초 하루를 정해서 그동안 손대지 않았던 자동 결제와 요금제, 구독 서비스를 한 번씩 점검하는 습관을 만들었습니다. 거창한 결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이거 지금도 필요한가?”라는 질문 하나만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이 습관을 들이고 나서 첫해에만 안 쓰던 구독 서비스 세 개를 해지했고, 통신비와 보험료를 합쳐 꽤 큰 금액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별다른 노력 없이 그냥 한 번 확인해본 것만으로 얻은 결과였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이 습관을 권했더니, 부모님도 몇 년째 안 쓰던 케이블 채널 옵션을 그제야 해지하셨다며 웃으셨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은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행동경제학의 디폴트 효과 개념에 비춰 정리한 내용입니다. 디폴트 효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매번 모든 선택을 처음부터 고민해야 한다면 오히려 지쳐버릴 테니까요. 다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걸 정말 원해서 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어서 따르고 있는가.” 그 질문 하나가, 몇 년째 관성적으로 흘려보내고 있던 돈과 시간을 되찾아줄지도 모릅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