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크엔드 법칙, 힘들었던 한 달을 저는 세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피크엔드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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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달이 정말 그렇게 힘들었나

이직 후 첫 한 달에 대해 쓴 글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다시 읽어봤는데, 읽는 내내 낯설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그 한 달은 세 장면입니다. 출근 첫날 삼십 분 일찍 집을 나서서 지하철에서 넥타이를 몇 번이나 고쳐 매던 아침, 회식에서 먼저 술잔을 채워드렸던 순간, 그리고 한 달쯤 지나 팀장님이 “요즘은 표정이 훨씬 편해 보이네요”라고 하신 날. 딱 이 셋입니다.

그런데 글에는 그 셋 말고도 여러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회의실에 5분 일찍 도착하는 걸 원칙으로 삼았던 것, 퇴근 후에도 회사 생각이 안 떠나 주말에 제대로 못 쉬었던 것, 동료 모임에 다 나가지 않기로 정했던 것. 제가 쓴 건데도 읽으면서 “아 이런 일도 있었지” 싶은 대목이 여럿이었습니다. 서른 날 중에 제 머리에 남은 게 사흘도 안 되는 셈입니다.

피크엔드 법칙, 기억은 총량으로 계산되지 않습니다

경험이 기억으로 넘어갈 때 무엇이 남는지를 다룬 개념이 있습니다. 피크엔드 법칙입니다. 어떤 일을 나중에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그 일이 얼마나 오래갔는지가 아니라, 가장 강렬했던 지점과 끝날 무렵이 어땠는지로 대체로 정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1993년 카너먼과 동료들이 한 실험이 이 개념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참가자들에게 14도 찬물에 손을 담그게 했습니다. 짧은 조건은 60초였습니다. 긴 조건은 같은 60초를 보낸 뒤 30초를 더 담그는데, 그 30초 동안 물 온도를 15도까지 아주 조금 올렸습니다.

긴 조건이 객관적으로는 더 나쁩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근 총 시간이 30초 더 길고, 추가된 30초도 여전히 차갑습니다. 그런데 둘 중 하나를 다시 하라고 하자 다수가 긴 쪽을 골랐습니다. 마지막 30초가 앞선 60초보다 아주 조금 덜 차가웠다는 이유만으로요.

고통의 총량이 더 큰 쪽을 사람들이 선택한 겁니다. 끝이 조금 나았다는 것 하나 때문에요.

주의할 것은 참가자들이 계산을 잘못했다기보다 애초에 다른 걸 계산했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다시 하겠느냐는 질문에 사람은 기억을 꺼내 답하지, 겪은 시간을 되짚어 합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억에 저장된 것은 가장 차가웠던 지점과 마지막 감각이었습니다.

지속 시간이 계산에서 빠지는 이유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시간이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걸 지속 시간 무시라고 부릅니다.

이게 이상하게 들리지만, 생각해보면 기억이 저장하는 방식과 맞아떨어집니다. 우리는 서른 날을 서른 번 저장하지 않습니다. 몇 개의 장면으로 저장합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를 다루면서도 비슷한 걸 봤는데, 기억은 성실한 기록 장치가 아니라 편집자에 가깝습니다.

제가 그 한 달을 세 장면으로 기억하는 것도 그래서일 겁니다. 가장 긴장했던 첫날 아침이 하나, 가장 신경 썼던 회식 자리가 하나. 그리고 마지막 자리에 팀장님의 그 한마디가 놓여 있습니다.

끝이 좋았던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 한 달을 “힘들었지만 잘 넘어간 시기”로 부르고 있었습니다. 만약 마지막 주에 뭔가 크게 어긋났다면, 같은 서른 날을 저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요.

내시경 연구가 남긴 불편한 질문

이 법칙은 실제 의료 현장에서도 검증됐습니다. 2003년에 대장내시경을 받는 환자 682명을 두 조건에 나눈 시험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표준 절차대로 진행했고, 다른 쪽은 검사가 끝난 뒤 내시경 끝을 최대 3분간 그대로 둔 채 마무리했습니다. 추가로 뭘 한 건 아니고, 덜 아픈 상태로 조금 더 머문 겁니다.

연장 조건 환자들은 나중에 그 경험을 덜 불편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중앙값 5년이 넘는 추적에서 재검사를 받으러 다시 올 확률이 더 높았습니다.

결과만 보면 좋은 이야기입니다. 검사를 덜 무섭게 기억하니 다음에 또 오고, 그래서 병을 일찍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는 불편한 질문도 같이 남깁니다. 연장 조건은 환자가 실제로 겪은 불편의 총량을 늘렸습니다. 기억을 낫게 만들기 위해 실제 경험을 더 준 겁니다. 환자에게 “지금부터 3분은 당신의 기억을 위한 시간입니다”라고 설명하지도 않았고요. 이런 방식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를 두고 의료윤리 쪽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피크엔드를 쓰고 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좀 찔렸습니다. 이름을 몰랐을 뿐이지 저도 이걸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블로그의 글들이 그렇습니다. 어떤 글이든 마지막 문단은 정리하는 문장으로 닫습니다. 앞에서 아무리 답답한 이야기를 했어도 끝은 한 발 나아간 자리에 둡니다. 그래야 읽고 나서 남는 게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그건 읽는 분의 기억이 어디에 자리 잡을지를 제가 정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나쁜 의도는 아닙니다. 다만 자각은 없었습니다.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두 가지는 구분이 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나아진 것을 마지막에 배치하는 것과, 실제로는 나아진 게 없는데 끝만 좋게 만들어 기억을 바꾸는 것. 앞의 것은 배려에 가깝고 뒤의 것은 다른 이름이 붙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시경 연구가 미묘한 자리에 있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아프지 않은 3분은 실제로 아프지 않았으니까요.

기억이 편집자라면, 무엇을 마지막에 둘 것인가

기억이 총량을 세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나면 두 가지 태도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억울해하는 쪽입니다. 서른 날을 견뎠는데 셋만 남다니 손해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편집을 인정하고 무엇을 마지막에 둘지 생각해보는 쪽입니다. 저는 뒤쪽이 낫다고 봅니다.

다만 이걸 기술처럼 쓰기 시작하면 방향이 이상해집니다. 끝을 좋게 만드는 데 신경 쓰느라 정작 중간을 방치하게 되거든요. 서른 날 중 셋만 기억에 남는다고 해서 나머지 스물일곱 날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살아낸 건 서른 날 전부입니다.

기억이 편집자라면, 저는 편집을 잘하는 사람보다 편집당할 원본을 잘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이 글은 심리학 개념을 참고해 제 경험을 정리한 기록이며, 진단이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