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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을 열고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찾는 것이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위 칸부터 훑었습니다. 없었습니다. 아래 칸도 봤습니다. 없었습니다.
다 뒤지고 나서 문을 닫으려는데 그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맨 앞줄, 눈높이에 있었습니다. 뒤로 밀려 있던 것도 아니고 다른 것에 가려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상한 건 제가 그 칸을 안 본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그쪽으로 눈이 갔습니다. 그런데 없다고 판단하고 다음 칸으로 넘어갔습니다.
그 몇 초 동안 제 눈에는 그것이 들어와 있었을 겁니다. 망막에 맺혔는데 저한테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무주의 맹시, 주의가 간 곳 바깥은 비어 있습니다
이런 일에 붙은 이름이 무주의 맹시입니다.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가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못 보는 것을 말합니다.
핵심은 보는 일과 알아차리는 일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으면 앞에 있는 것이 다 들어온다고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주의가 닿은 자리만 들어옵니다. 나머지는 눈에 맺히기만 하고 지나갑니다.
이걸 뚜렷하게 보여준 실험이 1999년에 나왔습니다.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만든 과제입니다.
참가자에게 짧은 영상을 보여줍니다. 흰옷을 입은 팀과 검은옷을 입은 팀이 섞여서 공을 주고받습니다. 과제는 하나입니다. 한쪽 팀이 공을 몇 번 주고받는지 세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겹쳐 지나다니기 때문에 세려면 꽤 집중해야 합니다.
영상 중간에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화면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옵니다. 잠깐 서서 가슴을 두드리고 반대편으로 빠져나갑니다. 몇 초 동안 화면에 있습니다. 작지도 않고 구석에 있지도 않습니다.
영상이 끝나면 개수를 물어보고, 그다음에 이상한 것을 보지 못했느냐고 묻습니다. 상당수가 못 봤다고 답했습니다. 연구진이 여러 조건을 합쳐 정리한 결과 참가자의 절반 가까이가 이 뜻밖의 등장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고릴라 조건만 놓고 보면 못 본 비율이 더 높았습니다.
세는 과제가 어려운 조건에서 놓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주의를 많이 쓸수록 바깥이 더 비었다는 뜻입니다.
반대쪽도 함께 확인됐습니다. 같은 영상이라도 우산을 쓴 사람이 지나가는 조건에서는 알아차린 비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세고 있던 팀의 옷 색과 가까운 쪽이 더 잘 걸렸습니다. 주의가 아예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찾고 있는 것과 비슷한 것만 통과시키는 셈입니다.
성실했기 때문에 놓쳤습니다
이 결과에서 제가 오래 생각한 대목이 있습니다. 못 본 사람들이 딴생각을 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개수를 정확히 세려고 애쓴 사람일수록 놓쳤습니다. 과제에 충실했기 때문에 치른 값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부주의가 아니라 주의의 성질입니다. 주의는 손전등에 가깝습니다. 어딘가를 비추면 그만큼 다른 곳이 어두워집니다. 불을 더 밝게 켜면 밝아진 자리 바깥은 더 캄캄해집니다.
점화효과를 쓰면서 앞에 들어온 것이 뒤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무주의 맹시는 그 앞 단계입니다. 영향을 받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아예 들어오지 않습니다.
더 곤란한 것은 못 봤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점입니다. 놓친 자리에 빈칸 표시가 남지 않습니다. 화면은 계속 매끄럽게 이어졌고, 본인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고릴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영상을 다시 볼 때 사람들이 놀랍니다.
이 맹시가 값을 치르는 자리
일상에서는 대개 넘어갑니다. 냉장고 앞에서 삼십 초 더 쓰는 정도입니다.
값이 커지는 자리는 따로 있습니다. 하나는 운전입니다. 앞차만 보고 있으면 옆에서 들어오는 것이 늦게 보입니다. 오토바이나 자전거처럼 예상 목록에 없는 것일수록 그렇습니다. 보고도 못 봤다는 진술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익숙한 일을 검토할 때입니다. 오타를 찾겠다고 마음먹고 읽으면 문장 구조가 안 보이고, 구조를 보겠다고 읽으면 오타가 안 보입니다. 한 번에 둘 다 보려고 하면 둘 다 어설퍼집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비슷합니다. 무엇을 확인하려고 마음먹고 대화에 들어가면 그것 말고는 잘 안 들립니다. 상대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도 제 목록에 없으면 흘러갑니다. 나중에 그 말을 왜 못 들었느냐는 소리를 들으면 억울한데, 억울해할 일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서 세고 있던 것이 따로 있었을 뿐입니다.
고립효과를 쓰면서 여럿 중에 하나만 달라도 그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적었는데, 그것도 주의가 그쪽으로 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주의가 딴 데 있으면 달라도 안 남습니다.
못 볼 수밖에 없다면 순서를 나눕니다
이 현상은 알아차린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실험을 아는 사람도 다른 영상에서는 또 놓칩니다. 주의의 용량이 늘어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없애는 대신 순서를 나누는 쪽으로 바꿨습니다. 한 번에 하나만 보기로요. 글을 볼 때 오타와 흐름을 같은 회차에 안 봅니다. 두 번 읽는 게 손해 같지만 한 번에 둘 다 보려다 둘 다 놓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찾는 물건이 없을 때도 같은 자리를 다시 훑기보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부터 다시 말해봅니다. 색이나 모양을 잘못 기억한 채로 훑으면 눈앞에 있어도 안 걸립니다. 제가 찾던 것이 맨 앞줄에 있었는데 못 본 것도 아마 그래서였을 겁니다.
본다는 말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그날 이후로 봤다는 말을 예전만큼 믿지 않습니다.
저는 그 칸을 봤습니다. 눈은 확실히 그쪽에 갔습니다. 그런데 못 봤습니다. 두 문장이 모순처럼 보이는데 둘 다 맞습니다. 본다는 말 안에 두 가지가 섞여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봤다는 말 대신 무엇을 찾으면서 봤는지를 떠올려봅니다. 찾는 것이 없으면 보는 일은 대체로 지나가는 일에 가깝습니다.
다른 사람이 놓친 것을 두고 어떻게 저걸 못 보느냐고 말하기도 조금 조심스러워졌습니다. 그 사람은 그때 다른 것을 세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저도 고릴라를 못 봤을 사람입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이 글은 심리학 개념을 참고해 제 경험을 정리한 기록이며, 진단이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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