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과 둘만 남은 거실, 침묵 4초가 하는 일

침묵4초 섬네일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자네 요즘 회사는 좀 어떤가.”

장인어른이 이렇게 물으시면 저는 안도합니다. 질문이 하나 들어왔으니 최소 2분은 벌었다는 뜻이거든요. 문제는 그 2분이 끝난 다음입니다.

처가에 가면 순서가 늘 비슷합니다. 인사를 하고, 과일이 나오고, 한참 이야기가 오가다가, 어느 순간 아내가 주방으로 갑니다. 장모님을 돕겠다며 일어서는 거죠. 아이들은 진작에 방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면 거실에는 장인어른과 저만 남습니다.

TV에서는 제가 본 적 없는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고, 저는 화면을 보는 척하면서 다음 화제를 찾기 시작합니다. 날씨는 아까 했고, 아이들 이야기도 했고, 그럼 뭐가 남았더라. 그러다 보면 컵을 괜히 한 번 더 들었다 놓게 됩니다.

추석이 3주쯤 남았습니다. 올해도 그 거실에 앉게 될 텐데, 올해는 좀 다르게 앉아보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침묵 4초, 알아채지 못해도 작동합니다

대화 중 침묵을 다룬 연구가 있습니다. 2011년 코우덴부르흐 연구진은 여러 사람이 대화하는 6분짜리 영상을 참가자들에게 보여줬습니다. 한쪽 조건에는 중간에 4초짜리 침묵을 끼워 넣었고, 다른 쪽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4초라는 길이는 사전 조사로 정한 것인데, 보는 사람이 “어, 지금 대화가 끊겼네”라고 의식적으로 알아채지는 못하면서도 대화가 덜 편하게 느껴지는 지점이었습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 침묵이 들어간 영상을 본 쪽에서 소속감과 자존감,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함께 떨어졌습니다. 거부당한 느낌과 부정적인 감정은 올라갔습니다. 자기가 대화에 낀 것도 아니고 그냥 남의 대화를 보기만 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참가자 대부분은 침묵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남의 대화를 화면으로 보기만 해도 그 정도인데,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제가 거실에서 느낀 조바심은 예의를 차리려는 마음이라기보다, 훨씬 아래쪽에서 자동으로 켜지는 경보에 가까웠던 겁니다. 화제를 찾느라 급해지는 건 그 경보를 끄려는 행동이었고요.

물론 이 연구가 처가 거실을 다룬 건 아닙니다. 여럿이 대화하는 영상을 본 상황이었으니까요. 다만 4초라는 짧은 시간이 소속감까지 건드린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눈여겨볼 만합니다.

아버지와의 침묵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말수가 아주 적은 분입니다. 같이 앉아 있으면 10분이고 20분이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습니다. TV를 같이 보다가 한 번씩 별것 아닌 말을 던지고, 대답이 없어도 그런가 보다 합니다.

같은 길이의 침묵인데 한쪽은 편하고 한쪽은 조바심이 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침묵의 길이가 아니었습니다. 그 침묵을 무엇으로 읽느냐였습니다.

아버지의 침묵은 원래 그런 분이라는 뜻으로 읽힙니다. 사십 년 가까이 봐온 사람의 침묵이니 따로 해석할 일이 없습니다. 반면 장인어른의 침묵은 매번 해석이 필요합니다. 지루하신 건가, 아까 한 말이 별로였나, 뭘 여쭤야 하나. 같은 4초에 저는 한쪽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고 다른 쪽에서는 계산을 돌립니다.

호감 격차, 짐작한 어색함은 누구 것이었나

여기에 붙는 연구가 하나 더 있습니다. 2018년 부스비 연구진이 호감 격차라고 이름 붙인 현상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끼리 대화를 나누게 한 뒤, 상대가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와 상대는 나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을지를 각각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뒤쪽을 꾸준히 낮게 잡았습니다. 상대가 실제로 매긴 점수보다 자기 짐작이 낮았다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건 그 대화 영상을 본 제3자들은 호감의 신호를 정확히 읽어냈다는 점입니다. 신호가 없었던 게 아니라, 당사자만 그걸 못 본 겁니다. 연구진은 원인을 자기 자신을 향한 비판적인 속말에서 찾았습니다.

이 격차는 오래갑니다. 기숙사에서 같이 지낸 학생들을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추적했더니, 2월까지도 남아 있다가 5월쯤 사라졌습니다. 반년을 붙어 지내야 겨우 없어진 셈입니다.

저는 장인어른을 1년에 서너 번 뵙습니다. 그 격차가 닳아 없어질 만한 시간이 애초에 쌓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면 반대쪽은 어떨까요. 장인어른도 사위와 둘만 남은 거실에서 비슷한 계산을 하고 계셨을 수 있습니다. 뭘 물어야 부담이 없을까, 저 친구가 지루해하는 건 아닌가 하고요.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여쭤본 적이 없으니까요. 다만 어색함이 저 혼자만의 것이었다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올해 추석에는 침묵을 그냥 두어보려 합니다

아직 가지 않았으니 해보려는 것만 적습니다.

우선 침묵이 오면 화제를 찾는 대신 그냥 두어보려 합니다. 4초가 어색한 건 제 몸이 그렇게 반응하는 것이지 장인어른이 저를 평가하고 계셔서가 아닙니다. 이건 다원적 무지와 닮았습니다. 둘 다 속으로는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각자 자기만 그런 줄 아는 상태요.

그리고 질문을 하나쯤 준비해 가려 합니다. 대단한 게 아니라 지난번에 하시던 이야기를 이어 묻는 정도면 됩니다. 텃밭이든 오래된 차든, 그분이 먼저 꺼내신 화제를 제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호는 충분할 겁니다.

다만 이걸로 어색함이 사라진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호감 격차가 반년 만에 겨우 없어진 연구를 보면, 1년에 서너 번 만나는 사이가 몇 번의 노력으로 편해지길 바라는 건 무리입니다. 편해지려고 애쓰기보다, 아직 편하지 않은 게 당연한 관계라는 걸 인정하고 앉아 있는 쪽이 낫겠다 싶습니다.

어색함은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습니다

거실의 침묵을 저는 오래 제 탓으로 읽었습니다. 사위 노릇을 잘 못하고 있다는 증거처럼요.

그런데 두 연구를 놓고 보니, 제가 읽어낸 건 대체로 제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4초가 켜는 경보와, 상대의 마음을 낮춰 잡는 습관이 겹쳐 있었을 뿐입니다. 아버지와의 침묵이 편한 건 제가 아들을 더 잘해서가 아니라, 그 침묵을 해석할 필요가 없을 만큼 시간이 쌓여서였습니다.

올해 추석에도 그 거실은 조용할 겁니다. 다만 조용한 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앉아 있으려 합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이 글은 심리학 개념을 참고해 제 경험을 정리한 기록이며, 진단이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