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성격론, 모임에서 제 성격을 맞혀보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혈액형 성격론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형, 혈액형 뭐예요, 맞혀볼게요

몇 해 만에 나간 모임이었습니다. 예전에 같이 글 쓰던 사람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였고, 처음 보는 얼굴도 둘쯤 섞여 있었습니다.

음식이 나오고 이야기가 몇 바퀴 돌았을 때 누군가 혈액형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더니 저를 보고 말했습니다.

“형, 혈액형 뭐예요. 아니다, 제가 맞혀볼게요.”

그 사람은 제 얼굴을 한참 보더니 A형일 것 같다고 했습니다. 말수가 적고 조심스러워 보인다고요.

맞았습니다. 테이블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습니다.

그 뒤로 십 분쯤 혈액형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누구는 역시 B형이라 자유롭다고 했고, 누구는 O형이라 사람을 잘 챙긴다고 했습니다. 다들 즐거워 보였고 저도 웃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는 길에 자꾸 걸렸습니다. 그날 제가 말수가 적었던 건 오랜만에 본 사람들 사이에서 어색해서였거든요. 집에서 아이들과 있을 때 저는 꽤 시끄럽습니다.

백 년쯤 전에 시작된 주장

혈액형 자체는 의학의 발견입니다. 사람의 피가 몇 가지 형으로 나뉜다는 사실은 이십 세기 초에 밝혀졌고, 덕분에 수혈이 안전해졌습니다. 여기까지는 굳건한 이야기입니다.

성격과 이어 붙인 건 그다음입니다.

1920년대에 일본의 한 교육학자가 혈액형에 따라 기질이 다르다는 주장을 담은 글을 발표했습니다. 조사 규모가 작았고 방법도 허술해서 당시 학계에서 곧 힘을 잃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에 일본에서 한 저술가가 이 주장을 대중서로 풀어내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책이 크게 팔렸고, 방송과 잡지가 받아 적었고, 혈액형별 궁합이나 직업 이야기가 줄줄이 따라 나왔습니다.

그 흐름이 한국으로도 건너왔습니다. 제가 어릴 때 이미 이 이야기는 상식처럼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혈액형별로 자리를 옮겨 앉아 특징을 말해보는 놀이를 한 기억도 납니다.

그러니까 이 믿음은 연구실에서 나와 퍼진 게 아니라, 책과 방송을 타고 퍼진 뒤에 연구가 뒤따라가 확인해본 쪽에 가깝습니다.

대규모 조사가 내놓은 밋밋한 답

그럼 연구는 뭐라고 할까요.

여러 나라에서 혈액형과 성격 검사 점수를 함께 모아 비교한 조사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일본과 미국의 대규모 설문 자료를 다시 분석한 연구도 있습니다.

결과는 한결같이 밋밋했습니다. 혈액형 집단 사이에 성격 점수의 차이가 거의 없거나, 있어도 우연으로 볼 만한 수준이었습니다. 혈액형으로 성격을 설명할 수 있는 몫은 사실상 없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관련이 확인되지 않았다는 말은 아직 못 찾았다는 말과 다릅니다. 찾을 만큼 찾아봤는데 잡히지 않았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혈액형이 성격을 만든다는 생물학적 경로도 제시된 적이 없습니다. 적혈구 표면의 단백질 모양이 어떻게 성격까지 이어지는지, 저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찾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나 맞는 말과, 맞는 것만 세는 습관

그런데도 이 이야기는 왜 이렇게 잘 맞는 것처럼 느껴질까요.

혈액형별 설명을 가만히 읽어보면 대부분 누구에게나 조금씩 해당됩니다. 꼼꼼하지만 가끔 대충 한다거나, 사람을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식이니까요.

바넘 효과를 쓰면서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말이 나만을 위한 말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다뤘는데, 혈액형 설명은 그 구조를 거의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습니다. 사람은 자기 믿음에 맞는 사례를 훨씬 잘 기억합니다. A형인 사람이 조심스럽게 행동하면 역시 A형이라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행동하면 그냥 그런 날인가 보다 하고 넘어갑니다. 맞는 것만 세고 어긋나는 건 세지 않으니 적중률이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날 모임에서도 제가 말수가 적은 건 세어졌고, 제가 아이들 앞에서 떠드는 모습은 아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혈액형은 네 칸뿐입니다. 아무 성격이나 대도 네 번에 한 번은 맞습니다. 거기에 그럴듯한 설명이 붙으면 적중처럼 보이고요.

이 이야기가 나쁘기만 한 건 아닙니다

짚어둘 게 있습니다.

혈액형 이야기가 근거가 약하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뜻은 아닙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말문을 트기에 이만큼 편한 소재도 드뭅니다. 저도 그날 웃으며 대화했고, 그 시간이 나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연구가 아직 다 끝난 것도 아닙니다. 성격을 재는 방법 자체에 한계가 있고, 문화권마다 결과가 조금씩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조사에서 작은 차이가 보고된 적도 있지만, 그게 어느 정도 신뢰할 만한지는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걸리는 건 다른 지점입니다. 재미로 시작한 말이 사람을 미리 판단하는 근거가 될 때입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팀을 짜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만나보기도 전에 결론이 내려질 때요.

라벨 효과를 쓰면서 붙은 이름표가 사람의 행동까지 바꾼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혈액형도 충분히 이름표가 될 수 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지하철에서

지하철에서 그날 대화를 되짚어봤습니다.

저를 A형이라고 맞힌 사람은 사실 제 성격을 맞힌 게 아니라 그날 제 모습을 읽은 거였습니다. 어색해하는 사람,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람이요. 그건 혈액형이 아니라 그 자리의 온도였습니다.

사람마다 그날그날의 자리가 있고, 그 자리가 말수를 정합니다. 같은 사람이 회의에서는 조용하고 주방에서는 수다스럽습니다. 혈액형은 그 차이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저를 알아보려고 애썼다는 것도 맞습니다. 처음 보는 사이에서 상대를 궁금해하는 마음은 꽤 귀한 거니까요. 다만 그 궁금증이 혈액형 네 칸에서 멈춰버리는 게 아까웠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자리에 가면 이렇게 말해볼까 합니다. 저는 A형인데, 그거 말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하고요.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이 아직 안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꽤 시끄러워졌습니다.

이 글은 널리 퍼진 믿음의 출처를 찾아보고 제 경험과 견줘본 개인적인 기록이며, 성격이나 대인관계 문제로 어려움이 크다면 심리학 전문가나 의료기관의 도움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