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아빠는 무슨 일 하는 거예요?
딸 학교에서 부모 직업 소개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됐고, 교실 앞에 섰습니다.
준비한 대로 말했습니다. 저는 심리학 연구를 읽고, 그걸 사람들이 일상에서 이해하기 쉽게 글로 풀어 쓰는 일을 한다고요. 인지 편향이라든지, 사람들이 판단할 때 생기는 착각 같은 걸 다룬다고요.
아이들 표정이 점점 멍해졌습니다. 한 아이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빠는 무슨 일 하는 거예요?”
교실에 웃음이 터졌습니다. 딸이 좀 창피해하는 게 보였습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는데, 문득 딸 방에 있던 스티커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습니다.
“혹시 스티커 두 개 받다가 하나로 줄면 기분 나쁜 적 있어요? 왜 그런지 알아보고 글로 쓰는 게 아저씨 일이에요.”
그러자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습니다. 저도 그런 적 있어요, 우리 엄마가 그랬어요. 교실이 순식간에 시끄러워졌습니다.
같은 일을 설명했는데, 첫 번째 말은 흘러가고 두 번째 말은 붙었습니다.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
칩 히스와 댄 히스 형제의 『스틱!』은 이 차이를 다룬 책입니다. 왜 어떤 아이디어는 사람들 머릿속에 오래 남고, 어떤 건 금방 사라지는지.
책에서 가장 먼저 짚는 장애물이 지식의 저주입니다. 한번 뭔가를 알고 나면, 모르는 상태가 어땠는지 상상하기 어려워진다는 겁니다.
이걸 보여주는 실험이 있습니다. 1990년에 스탠퍼드 대학원생 엘리자베스 뉴턴이 한 연구입니다.
참가자를 두 역할로 나눴습니다. 한쪽은 누구나 아는 노래를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립니다. 다른 쪽은 그 소리만 듣고 무슨 노래인지 맞힙니다.
두드리는 사람들은 듣는 사람이 절반쯤은 맞힐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실제로는 백스무 곡 중에 세 곡만 맞혔습니다.
두드리는 사람 머릿속에는 멜로디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드리는 소리가 노래처럼 들렸죠. 듣는 사람에게는 그냥 딱딱 소리였고요.
더 흥미로운 건 두드리는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듣는 사람이 못 맞히면 답답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모르냐는 식으로요. 문제는 듣는 쪽이 아니라 두드리는 쪽 머릿속에만 있는 멜로디였는데도요.
제 첫 번째 설명이 딱 그 두드림이었습니다. 저한테는 인지 편향이라는 말에 수많은 장면이 붙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는 그냥 소리였습니다.
스티커 한 장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히스 형제는 오래 남는 메시지들을 모아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단순할 것. 여기서 단순함은 쉽다는 뜻이 아니라, 핵심 하나로 추려졌다는 뜻입니다. 의외성이 있을 것. 예상을 살짝 깨야 주의가 붙습니다. 구체적일 것.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야 합니다. 믿을 만할 것. 숫자나 권위가 아니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는 방식일수록 좋습니다. 감정을 건드릴 것. 그리고 이야기로 전할 것.
책은 이 여섯 가지의 영어 머리글자를 따서 단어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단어보다 각 항목에 붙은 사례들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그게 이 책의 주장을 증명하는 셈이기도 했고요.
제 두 번째 설명을 다시 보면, 스티커라는 구체적인 사물이 있었고, 아이들 각자 겪어본 장면이 있었고, 짧았습니다. 인지 편향이라는 추상적인 말은 하나도 없었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제 일을 이해했습니다.
바넘 효과를 쓰면서 누구에게나 맞는 막연한 말이 오히려 나한테 딱 맞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다뤘는데, 달라붙는 메시지는 그와 반대로 구체적이어서 각자 자기 장면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달라붙는다고 다 맞는 건 아닙니다
짚어둘 게 있습니다.
이 책은 메시지를 어떻게 전달할지를 다룹니다. 무엇이 사실인지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방법은 틀린 이야기도 달라붙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책에서 분석한 달라붙는 이야기들 중에는 도시 전설이나 근거 없는 소문도 있습니다. 히스 형제는 그런 이야기가 왜 잘 퍼지는지를 분석하고, 같은 원리를 좋은 메시지에 쓰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연구서라기보다 사례를 엮은 실용서입니다. 여섯 가지 원칙이 실험으로 하나하나 검증된 틀은 아닙니다.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조심하는 부분이 여기입니다. 제 글이 잘 읽히게 하려고 구체적인 장면을 쓰는데, 그 장면 때문에 연구의 한계가 가려지면 안 되니까요. 달라붙는 것과 정확한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늘 어렵습니다.
개념보다 장면을 먼저 꺼냅니다
그날 이후로 제 글쓰기에서 바뀐 게 있습니다.
개념 이름으로 글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대신 제가 겪은 장면이나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순간을 먼저 꺼냅니다. 개념은 그다음에 그 장면의 이름으로 붙입니다.
그리고 글을 다 쓴 다음에 한 번 물어봅니다. 이 글을 초등학생에게 설명한다면 어떤 사물 하나를 들고 가야 할까. 그 사물이 떠오르지 않으면 제가 아직 핵심을 못 잡은 거라고 봅니다.
집에서도 씁니다. 아이들한테 뭔가를 설명할 때 원칙부터 말하지 않고 예를 먼저 듭니다. 왜 손을 씻어야 하냐고 물으면, 세균 이야기보다 아까 만진 놀이터 손잡이 이야기를 먼저 합니다.
라벨 효과를 쓰면서 이름 하나가 사물을 다르게 보이게 한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개념의 이름도 장면이 먼저 있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너희 아빠는 스티커 연구하는 사람이래
그날 저녁 딸이 친구들한테 들은 이야기를 전해줬습니다. 너희 아빠는 스티커 연구하는 사람이래, 하고 친구들이 쉬는 시간 내내 말했다고요.
좀 웃겼습니다. 정확한 설명은 아니니까요. 스티커는 제가 다루는 수많은 예 중 하나일 뿐인데요.
그런데 몇 주 뒤에 딸 친구 하나가 저를 보더니 아저씨 스티커 연구하는 분이죠, 하고 인사했습니다. 그 아이 머릿속에는 제 직업이 스티커로 붙어 있었던 겁니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붙어는 있었습니다. 첫 번째 설명보다는 확실히 나았습니다.
다음에 또 그런 시간이 오면 뭘 들고 갈지 벌써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책을 읽고 제 경험을 돌아본 기록일 뿐이며, 교육이나 발표에 관한 전문적인 조언이 필요하다면 해당 분야 전문가의 안내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 다중지능 이론, 학원 유리창의 문구 앞에서 잠깐 멈춰 섰습니다 - 10월 8, 2026
- 콰이어트, 혼자 있는 시간이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이었습니다 - 10월 7, 2026
- MBTI, 단톡방에 네 글자가 줄줄이 올라오던 저녁에 생각한 것들 - 10월 7, 20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