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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에서 다섯 살 딸아이가 인형 두 개를 가지고 노는 걸 지켜보다가 소름이 돋은 적이 있습니다. 딸은 인형 하나의 목소리를 낮게 깔며 “너 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라고 했고, 다른 인형의 목소리로는 “내가 뭘 어쨌다고!”라며 언성을 높였습니다. 문제는 그 말투와 억양이, 며칠 전 저와 아내가 집안일 문제로 다퉜을 때 저희가 주고받았던 말과 토씨 하나까지 거의 똑같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습니다. 아이 앞에서는 절대 싸우지 말자고 늘 다짐했는데, 그날은 방심한 사이 아이가 다 보고 듣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더 놀라웠던 건 아이가 그 말투뿐 아니라 팔짱을 끼는 몸짓, 한숨 쉬는 타이밍까지도 비슷하게 따라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인형을 내려놓은 뒤에도 저는 한참 동안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이 일을 겪고 나서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어른의 행동을 따라 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게 ‘보보인형 실험’이었습니다.
보보인형 실험은 무엇을 보여준 실험일까
보보인형 실험은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1960년대에 진행한 유명한 연구입니다. 연구진은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어른이 오뚝이 인형을 대상으로 거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그룹에는 어른이 인형을 조용히 가지고 노는 모습만 보여줬습니다. 그 뒤 아이들을 각각 같은 인형이 있는 방에 혼자 두고 관찰했더니, 거친 행동을 봤던 아이들이 그 어른의 행동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른이 썼던 것과 똑같은 말까지 그대로 흉내 냈다고 합니다.
이 실험이 중요한 이유는, 그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행동은 직접적인 보상이나 벌을 통해서만 학습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실험은 아이가 어떤 보상 없이도, 단지 누군가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행동을 학습하고 따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이걸 관찰 학습이라고 부르는데, 아이들은 특히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어른, 그러니까 부모의 행동을 가장 강력한 학습 대상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저희 딸이 부부싸움의 말투를 그대로 재연했던 것도, 정확히 이 관찰 학습이 작동한 결과였던 셈입니다.
이 연구는 이후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둘러싼 오랜 논쟁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폭력적인 장면을 담은 영상이나 게임을 반복해서 접한 아이들이 실제로 그 행동을 따라 하는 경향이 있는지를 두고 지금도 여러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데, 관찰 대상이 화면 속 인물이든 눈앞의 부모든 아이의 뇌가 그 행동을 학습 자료로 받아들인다는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고 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뿐 아니라 저희 부부의 일상적인 모습 자체가 아이에게는 매일 반복해서 보여주는 하나의 콘텐츠와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는 우리가 말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가장 크게 와닿았던 건, 아이에게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아무리 말로 가르쳐도, 정작 부모가 다투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말보다 행동이 훨씬 강하게 아이에게 각인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이에게 좋은 말만 골라서 가르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이는 제가 하는 말이 아니라 제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훨씬 더 예민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곁에서 바꿔본 것들
그날 이후로 저희 부부는 의견 차이가 생겨도 아이 앞에서는 감정적으로 부딪히지 않으려 훨씬 조심하게 됐습니다. 대신 아이가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일부러 서로 존댓말로 차분하게 이야기하거나, “우리 이 부분은 다르게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처럼 갈등을 건강하게 풀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려 합니다. 완벽하게 지켜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예전보다는 훨씬 의식적으로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아이가 우리의 싸움뿐 아니라 화해하는 모습까지 함께 지켜본다면, 그것도 하나의 배움이 될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을 때의 효과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 전 제가 무거운 짐을 든 이웃분을 도와드렸는데, 며칠 뒤 딸이 어린이집에서 친구의 가방을 대신 들어줬다는 이야기를 선생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특별히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는데, 아이는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아이 앞에서 조심해야 할 건 갈등의 순간만이 아니라 평소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은 제가 직접 겪은 경험을 보보인형 실험이라는 개념에 비춰 정리한 내용입니다. 아이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무심코 보여주는 일상의 모습을 훨씬 더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 아이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가요. 완벽한 부모가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가끔 떠올려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요즘도 아이와 함께 있을 때면, 문득문득 그날의 인형놀이 장면을 떠올리며 제 말과 행동을 한 번 더 돌아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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