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표지 가설, 결정하기 전에 몸이 먼저 답합니다

신체 표지 가설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목록을 다 적고도 못 정했습니다

몇 달 전에 정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었고 되돌리기 어려운 쪽이었습니다.

저는 종이에 장단점을 적었습니다. 양쪽을 다 적고 세어봤습니다. 개수가 거의 같았습니다. 중요도에 가중치를 매겨봤는데 그래도 비슷했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목록은 점점 길어졌고 결론은 그대로였습니다. 정보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알아야 할 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이상한 걸 알아차렸습니다. 한쪽을 골랐다고 상상하면 속이 가라앉고, 다른 쪽을 골랐다고 상상하면 뭔가 걸렸습니다. 목록에는 그 차이가 안 적혀 있었습니다.

다마지오가 관찰한 환자

이 어긋남을 설명하는 틀이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데카르트의 오류」에 있습니다. 1994년에 나온 책이고 우리말로도 번역돼 있습니다.

책의 출발점은 한 환자입니다. 뇌 앞쪽의 일부를 수술로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검사에서 지능과 기억, 언어, 논리는 모두 정상 범위였습니다. 문제가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생활이 무너졌습니다. 일을 계속 못 했고 관계도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결정이었습니다.

다마지오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는 사소한 선택에 엄청난 시간을 썼습니다. 어느 서류부터 처리할지, 다음 약속을 며칠로 잡을지 같은 것들이요. 선택지의 장단점은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거기서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안 됐습니다.

같이 확인된 것이 감정 반응의 변화였습니다. 강한 장면을 봐도 몸이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알기는 아는데 느끼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다마지오는 여기서 반대 방향의 결론을 끌어냈습니다. 감정이 이성을 방해한다는 통념과 달리, 감정이 빠지면 이성이 결정까지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몸의 신호가 선택지를 미리 줄입니다

다마지오가 붙인 이름이 신체 표지 가설입니다.

설명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지를 떠올릴 때 그것과 관련된 몸의 상태를 함께 불러옵니다. 예전에 비슷한 일에서 겪은 결과가 몸에 표시처럼 남아 있고, 그 표시가 선택지에 값을 매깁니다.

이 값이 붙으면 계산할 것이 줄어듭니다. 열 개의 선택지 중 일곱 개가 시작부터 빠지고, 남은 셋을 두고 따지게 됩니다. 이 걸러내기가 없으면 열 개를 전부 끝까지 계산해야 하는데, 그건 시간 안에 안 끝납니다.

연구진이 만든 카드 과제가 이걸 보여줬습니다. 네 뭉치 중 두 뭉치는 한 번에 크게 따지만 손실도 커서 결국 마이너스가 되고, 두 뭉치는 작게 따면서 안전합니다. 참가자는 이 구조를 모른 채 계속 뽑습니다.

보통의 참가자들은 어느 뭉치가 나쁜지 말로 설명하기 전부터 그 뭉치로 손을 뻗을 때 피부 반응이 올라갔습니다. 몸이 먼저 알았다는 쪽으로 해석됐습니다.

반면 앞서 말한 환자와 비슷한 손상을 가진 참가자들은 그 반응이 잘 나타나지 않았고, 나쁜 뭉치를 계속 골랐습니다. 구조를 설명해줘도 선택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대목이 기록돼 있습니다. 아는 것과 고르는 것이 따로 움직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정서 예측 오류를 쓰면서 미래의 감정 크기를 잘못 재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여기서는 지금의 감정이 자료로 쓰입니다. 예측은 틀려도 현재 반응은 정보일 수 있습니다.

이 가설에는 반박도 만만치 않습니다

적어두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이 가설은 널리 인용되지만 그만큼 반박도 쌓였습니다.

2004년에 나온 재검토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이 몸으로만 안 게 아니라 이미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결과가 보고됐습니다. 물어보는 방식을 바꾸자 참가자들이 뭉치의 성질을 꽤 정확히 답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여러 검토 논문에서도 이 카드 과제가 신체 표지를 증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가 나왔습니다. 몸의 반응과 결정 사이의 인과 방향을 가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가설을 확정된 기제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환자 관찰 쪽은 남습니다. 지능이 그대로인데 결정이 안 되는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무게가 있습니다.

목록과 몸을 같이 쓰는 순서

제가 실제로 쓰는 방식은 세 단계입니다.

첫째, 장단점 목록은 그대로 씁니다. 이걸 건너뛰고 느낌으로만 가면 그날 기분에 휘둘립니다. 목록은 기분이 아닌 것들을 붙잡아두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 각 선택지를 이미 정해진 일처럼 상상합니다. 고민하는 자세가 아니라 통보받은 자세로요. 이게 결정했습니다, 하고 속으로 말해보고 몸의 반응을 봅니다. 가슴이 가라앉는지, 뭔가 걸리는지만 보면 됩니다.

셋째, 목록과 몸이 갈리면 그걸 신호로 봅니다. 목록은 반반인데 몸은 한쪽으로 기울면, 목록에 안 적힌 항목이 있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그게 뭔지를 찾아봅니다.

저는 그때 찾았습니다. 한쪽에는 제가 몇 년 들인 시간을 접는 일이 들어 있었고, 저는 그걸 단점 칸에 안 적었습니다. 적기 싫었던 것 같습니다.

목록에서 빠지는 항목에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적으면 제가 곤란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체면이 걸린 일, 누군가에게 미안해지는 일, 내가 틀렸다고 인정해야 하는 일이요. 그런 것들은 목록에 안 올라가는데 결정에는 계속 영향을 줍니다.

매몰비용 오류를 쓰면서 들인 것 때문에 못 그만두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그 항목이 제 목록에서 빠져 있었던 겁니다. 몸은 그걸 계속 세고 있었고요.

몸의 신호는 답이 아니라 질문입니다

결국 저는 결정했습니다. 몸이 가리킨 쪽으로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찾아보니 제 몸이 걸렸던 이유는 손해 때문이 아니라 미안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제가 감당할 일이었고 선택의 근거로 쓸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고 나니 그쪽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몸의 신호를 결론으로는 안 씁니다. 목록에 빠진 칸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표시로만 씁니다. 표시를 따라가 보면 대개 적기 싫어서 안 적은 것이 나옵니다.

다마지오 책에서 제게 남은 문장은 이겁니다. 느끼지 않으면 고르지 못한다는 것이요. 저는 며칠 동안 안 느끼려고 애쓰면서 고르려고 했습니다.

저는 뇌과학이나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고, 이 글도 그 분야의 지식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책의 관점을 제 결정 과정에 대본 기록으로만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진단이나 치료에 관한 판단은 전문 기관의 몫입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