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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 입구에서 삼십 초
타던 차가 오래돼서 중고차 매장에 갔습니다. 아내는 아이들 학원 픽업 때문에 못 오고, 저 혼자였습니다.
넓은 야외 주차장에 차들이 빼곡했습니다. 입구에서 둘러보는데 은색 소형 SUV 한 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깔끔해 보였고, 왠지 이 차다 싶었습니다.
그 옆에는 조금 더 싼 짙은 남색 세단이 있었습니다. 범퍼 모서리에 긁힌 자국이 있고 실내 시트도 살짝 바래 있었습니다. 보자마자 별로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딜러가 다가왔습니다. 말이 빠르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상하게 그 사람의 말투가 거슬렸습니다. 이 사람 말은 반만 믿자, 속으로 그렇게 정해버렸습니다.
매장에 들어선 지 일 분도 안 돼서 저는 차 두 대와 사람 한 명에 대한 판단을 다 끝낸 상태였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꼼꼼히 보고 오라고요. 예전에 가전제품을 매장에서 보자마자 사 왔다가 한 달 만에 후회한 적이 있었거든요. 알겠다고 대답했는데, 막상 매장에 서니 그 다짐보다 눈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소리를 끈 강의 영상
말콤 글래드웰의 『블링크』는 이런 순간적인 판단을 다룬 책입니다. 글래드웰은 저널리스트이고, 여러 연구와 사례를 엮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책의 핵심 개념은 얇게 조각내기입니다. 아주 적은 정보, 아주 짧은 순간만 보고도 상황이나 사람의 중요한 특징을 알아채는 능력을 말합니다.
글래드웰이 소개하는 연구 중 하나가 1993년에 심리학자 날리니 앰버디와 로버트 로젠탈이 발표한 연구입니다. 이들은 대학 강사들의 강의 장면을 소리 없이 아주 짧게 잘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강사의 인상을 평가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몇 초짜리 영상을 보고 내린 평가가 한 학기 동안 그 강의를 들은 학생들의 평가와 꽤 비슷하게 나왔습니다.
영상 길이를 더 짧게 줄여도 비슷한 경향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정확히 몇 초까지 줄였는지와 상관의 크기는 제가 원문으로 확인하지 못해서 여기서는 쓰지 않겠습니다.
오래 생각한다고 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글래드웰이 이 연구로 말하고 싶은 건 이렇습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빠르게 패턴을 읽어내는 부분이 있고, 이 부분이 내리는 판단이 생각보다 정확할 때가 많다는 겁니다.
책에는 오래된 조각상이 진품인지 가리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여러 검사를 거쳐 진품이라는 결론이 났는데, 몇몇 전문가는 보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는 일화입니다. 오래 따져본 분석보다 첫눈의 느낌이 맞았다는 거죠.
생각에 관한 생각을 쓰면서 빠르고 자동적인 생각과 느리고 신중한 생각을 나누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블링크』는 그중 빠른 쪽에 좀 더 후한 점수를 주는 책입니다.
그 매장에서 제가 은색 SUV에 끌린 것도 그런 빠른 판단이었을 겁니다. 문제는 그게 맞는 판단이었느냐였습니다.
섞여서 돌아온 결과
직접 시동을 걸고 매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아봤습니다.
은색 SUV는 첫인상 그대로였습니다. 소음이 적고 핸들이 부드러웠습니다. 나중에 정비 이력을 보니 관리가 꾸준히 된 차였고요. 제 직감이 맞은 셈입니다.
남색 세단은 반대로 첫인상이 틀렸습니다. 긁힌 범퍼와 바랜 시트 말고는 흠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엔진 상태는 오히려 SUV보다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겉모습 몇 군데가 제 판단을 통째로 끌고 간 겁니다.
딜러에 대한 판단도 틀렸습니다. 말이 빠른 건 그냥 그 사람의 버릇이었습니다.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SUV의 사고 이력 한 건을 먼저 짚어줬습니다. 작은 접촉 사고였지만, 그걸 먼저 말해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초두효과를 쓰면서 처음 들어온 정보가 뒤따르는 판단을 끌고 간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그날 저는 첫 삼십 초에 나머지 한 시간을 맡겨버릴 뻔했습니다.
직감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면
짚어둘 게 있습니다.
글래드웰도 책에서 순간적인 판단이 크게 틀리는 경우를 다룹니다. 겉모습이나 고정관념에 끌려가는 판단이요. 그런데 책을 덮고 나면 직감을 믿으라는 메시지가 더 크게 남는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언제 직감이 맞고 언제 틀리는지를 가려주는 기준은 책에서 뚜렷하게 나오지 않습니다.
또 이 책은 연구보다 일화에 크게 기댑니다. 조각상 이야기처럼 인상적인 사례는 기억에 오래 남지만, 첫눈의 판단이 틀렸던 수많은 경우는 이야기로 남지 않습니다. 맞았던 사례만 모아 보면 직감이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직감이 잘 맞는 건 대체로 그 분야에서 오래 경험을 쌓고, 판단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빨리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일 때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중고차를 몇 년에 한 번 사는 저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았고요.
첫인상은 메모지에 적어두고
그 뒤로 저는 첫인상을 버리지 않되, 결론으로 삼지도 않기로 했습니다.
요즘은 무언가를 처음 볼 때 떠오르는 느낌을 휴대폰 메모에 짧게 적어둡니다. 좋아 보인다, 왠지 불편하다 같은 한 줄이요. 그리고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하나씩 모읍니다. 다 모은 뒤에 첫 메모를 다시 봅니다.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습니다. 그 기록이 쌓이니 제 직감이 어떤 데서 잘 맞고 어떤 데서 자꾸 빗나가는지가 조금씩 보입니다. 저는 사람의 말투에 대한 첫인상이 특히 잘 틀리는 편이었습니다.
반대로 원고에 대한 첫인상은 꽤 잘 맞았습니다. 초고를 다시 읽을 때 어딘가 걸린다 싶은 문단은 대개 정말로 고쳐야 할 문단이었습니다. 오래 써온 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사람의 직감도 분야에 따라 믿을 만한 정도가 다르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습니다.
결국 차는 은색 SUV로 샀습니다. 첫눈에 고른 그 차요. 다만 남색 세단을 한참 시승해본 뒤였습니다. 아내에게 전화로 두 차를 설명하면서, 제가 왜 SUV를 고르는지 말로 풀어보니 이유가 첫인상만은 아니라는 게 확인됐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오는데 딜러가 빠른 말투로 조심히 가시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말투가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판단과 직관에 관한 교양서를 제 경험에 비춰본 개인적인 기록이며, 중요한 결정 앞에서 판단이 자꾸 흔들려 일상이 힘들다면 관련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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