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관한 생각, 저자가 나중에 물러선 챕터가 있습니다

생각에 관한 생각 섬네일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밑줄을 다시 본 날

책장 두 번째 칸에서 다시 꺼낸 건 다른 걸 찾다가였습니다. 두께가 있어서 뒤쪽 책을 가리고 있었고, 빼내는 김에 펼쳐봤습니다. 4장에 밑줄이 여러 줄 그어져 있었습니다. 볼펜 자국이 진한 걸 보면 한 번에 죽 그은 모양입니다. 몇 년 전의 제가 감탄하며 그은 자국입니다.

그중 한 줄이 이랬습니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 결과들은 조작된 것도, 통계적 우연도 아니다.

읽던 당시에는 이 단호함이 좋았습니다. 지금은 다르게 읽힙니다. 저 문장이 가리키던 실험들이 그 뒤로 재현에 실패했고, 저자 본인이 물러섰기 때문입니다.

점화 효과, 단어 몇 개가 걸음을 늦춘다는 실험

4장이 다루는 것은 점화 효과입니다. 앞서 들어온 자극이 뒤따르는 판단과 행동에 손을 대는데, 정작 본인은 그 연결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것이 1996년 존 바그의 실험입니다.

참가자들에게 흩어진 단어를 배열해 문장을 만들게 하는데, 한쪽 조건에만 노년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섞어둡니다. 주름, 회색, 은퇴 같은 것들입니다. 과제가 끝나고 참가자가 복도를 걸어 나갈 때 그 시간을 몰래 재보니, 노년 단어를 본 쪽이 더 느리게 걸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단어들의 공통점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의식이 닿지 않는 곳에서 행동이 조정된다는 그림이라 파장이 컸고, 인용 횟수가 2천 회에 육박할 만큼 퍼졌습니다.

2012년 다우엔 연구진이 이 실험을 다시 했습니다. 달라진 점이 셋이었습니다. 참가자를 두 배로 늘렸고, 걷는 시간을 초시계 대신 적외선 센서로 쟀고, 실험을 진행하는 사람 네 명에게 연구 목적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사람 손과 사람 기대가 들어갈 자리를 줄인 셈입니다.

결과는 아무 차이도 없었습니다. 단어는 걸음 속도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로젠탈 효과가 점화 실험 안에 있었습니다

연구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번 더 했습니다. 이번에는 참가자 50명에 진행자 10명을 새로 두고, 진행자 절반에게만 “참가자가 느리게 걸을 것”이라고 미리 일러줬습니다.

그러자 느려졌습니다. 다만 그렇게 기대한 진행자가 맡은 참가자들만요.

저는 이 대목에서 잠깐 멈췄습니다. 기대가 결과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저는 로젠탈 효과 글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교사의 기대가 아이를 바꾼다는 쪽으로, 좋은 이야기로 썼습니다.

그런데 같은 원리가 실험실에서는 없는 효과를 만들어 보이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초시계를 누르는 사람이 결과를 알고 있으면, 0.1초를 어느 쪽으로 반올림할지가 미세하게 기울 수 있습니다. 그걸 조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습니다. 본인도 모르니까요. 사람의 기대는 결과를 밀어 올리기도 하고, 없던 결과를 있는 것처럼 보이게도 합니다. 점화 효과를 증명하려던 실험이 실은 다른 효과를 보여주고 있었던 셈입니다.

저자 본인이 물러선 자리

카너먼은 2012년에 점화 연구자들에게 공개 서한을 보냈습니다. 검증을 서두르지 않으면 이 분야가 위태로워진다는 취지였습니다.

더 분명한 건 2017년입니다. 한 연구자가 블로그에 이 챕터의 인용 문헌들을 하나씩 점검한 글을 올렸습니다. 어떤 연구가 몇 명을 대상으로 했고 결과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선에서 나왔는지를 죽 늘어놓은 글이었습니다. 거기에 카너먼이 직접 댓글을 달았습니다. 표본이 작은 연구들을 자신이 너무 믿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책에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쓴 사람이 6년 뒤에 남긴 말입니다.

저는 이 태도 자체는 존중합니다. 노벨상을 받은 저자가 자기 책의 한 챕터를 두고 공개적으로 물러서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조용히 넘어가거나, 비판한 쪽의 자격을 문제 삼는 방향으로 갑니다.

점화·호손·던바, 제 글 세 편이 그 자리였습니다

책을 덮고 제 글 목록을 열어봤습니다. 인지 효과를 다룬 글이 스무 편 남짓인데, 그중 세 편이 나중에 크게 흔들린 개념이었습니다.

점화효과가 첫 번째입니다. 방금 적은 그 실험입니다.

호손 연구가 두 번째입니다. 1920년대 공장에서 조명을 밝게 해도 어둡게 해도 생산성이 올랐고, 결국 관찰당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을 바꾼다는 결론으로 정리된 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원자료는 오래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2011년에 두 경제학자가 그 자료를 찾아내 다시 분석했습니다. 널리 인용되던 극적인 패턴은 원자료에 없었습니다. 미묘한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교과서에 실린 형태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팔십 년 동안 아무도 원본을 대조하지 않은 채 인용만 이어진 셈입니다.

던바의 법칙이 세 번째입니다. 인간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인원이 150명이라는 그 숫자를, 2021년 연구진이 같은 방법으로 다시 계산했습니다. 95퍼센트 신뢰구간이 4명에서 520명까지 벌어졌습니다. 하나의 숫자를 특정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재현성이 아니라 문장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손실 회피나 기준점 효과처럼 저자 본인이 수십 년에 걸쳐 직접 검증한 축은 지금도 단단합니다. 흔들린 건 그가 남의 연구를 빌려 쓴 대목이었습니다.

제게 남은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잘못된 연구를 인용한 것보다, 독자에게 의심할 자리를 남기지 않는 문장으로 쓴 쪽입니다.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는 문장 앞에서 독자는 판단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 실험이 몇 명을 대상으로 했는지, 걷는 시간을 누가 어떻게 쟀는지는 그 문장 뒤로 밀려납니다. 밑줄을 그은 몇 년 전의 저도 그런 걸 물어볼 생각을 못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렇게 써왔습니다. 효과 하나를 소개하면서 “그래서 이런 일이 생깁니다”라고 매듭지은 글이 제 목록에 여럿 있습니다. 실험 하나가 보여준 것은 그 조건에서 그런 경향이 관찰됐다는 것뿐인데 말입니다. 앞으로는 한 문장을 덜 단정하게 쓰는 쪽으로 가려 합니다. 읽는 맛은 줄겠지만, 몇 년 뒤에 제가 다시 꺼내 봤을 때 물러설 일이 적을 겁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이 글은 책을 읽고 제 생각을 정리한 기록이며, 진단이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