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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며 이름을 말하던 저녁
딸아이 반 학부모 모임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아내가 회사 일로 늦게 끝나서 제가 대신 나갔습니다.
교실 뒤편에 둥글게 의자를 놓고 앉았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자고 하셨습니다. 누구 엄마, 누구 아빠, 이름은 뭐고, 아이는 어떤 편이고.
열 명 남짓이 차례로 말했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습니다.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끝나고 복도로 나오는 순간, 머릿속에 남은 이름이 거의 없었습니다. 방금 인사를 나눈 분이 신발장 앞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는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색하게 웃기만 했습니다.
딱 한 분만 예외였습니다. 자기 이름이 한결이라고 소개한 아버님이었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저는 속으로 한결같다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마침 그분이 아이를 매일 같은 시간에 학교 앞까지 데려다준다는 얘기를 하셔서, 한결같은 사람이 한결이구나 하고 혼자 이어 붙였습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모임 얘기를 하는데, 기억나는 이름은 그분 하나였습니다.
얕게 듣기와 깊게 듣기
이 차이를 설명하는 이론이 있습니다. 1972년에 퍼거스 크레이크와 로버트 록하트가 제안한 처리 수준 이론입니다.
당시 기억 연구는 기억을 몇 개의 저장 칸으로 나눠 보는 시각이 주류였습니다. 짧게 담아두는 칸이 있고, 오래 담아두는 칸이 있고, 정보가 그 사이를 옮겨 다닌다는 식이죠.
크레이크와 록하트는 다르게 봤습니다. 어느 칸에 들어가느냐보다 정보를 얼마나 깊이 처리하느냐가 기억을 좌우한다고요.
얕은 처리는 겉모양을 보는 겁니다. 글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소리가 어떤지. 깊은 처리는 의미를 따지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내가 아는 것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두 사람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습니다. 같은 정보를 여러 번 되뇌는 것만으로는 기억이 크게 좋아지지 않을 수 있다고요. 소리만 반복하면 얕은 처리를 반복하는 셈이니까요. 전화번호를 걸 때까지만 입으로 중얼거리고 금세 잊어버리는 경험이 그런 경우일 겁니다.
그날 저는 대부분의 이름을 소리로만 들었습니다. 한결이라는 이름만 뜻으로 들었고요.
돌이켜보면 다른 분들이 말할 때 저는 제 차례에 뭐라고 소개할지 궁리하느라 바빴습니다. 이름은 귀에 들어왔지만 그 이름을 두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들었다는 것과 처리했다는 것은 다른 일이었던 겁니다.
대문자인가, 운이 맞는가, 문장에 들어가는가
이 생각을 실험으로 보여준 연구가 1975년에 크레이크와 엔델 툴빙이 발표한 연구입니다.
참가자들은 단어를 하나씩 보면서 질문에 답했습니다. 질문은 세 종류였습니다. 이 단어가 대문자로 쓰였는가 하는 겉모양 질문, 이 단어가 어떤 단어와 운이 맞는가 하는 소리 질문, 이 단어가 어떤 문장의 빈칸에 들어맞는가 하는 의미 질문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나중에 기억 검사가 있다는 걸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검사를 해보니, 의미 질문을 받았던 단어를 가장 잘 알아봤습니다. 겉모양 질문을 받은 단어가 가장 약했고요.
외우려고 애쓴 사람도 없었습니다. 단지 단어를 어떤 방식으로 들여다봤느냐가 달랐을 뿐입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를 쓰면서 끝내지 못한 일이 머릿속에 오래 남는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처리 수준 이론은 무엇이 남느냐를 다른 각도에서 봅니다. 얼마나 오래 붙잡고 있었느냐보다 얼마나 깊이 들여다봤느냐가 중요하다는 쪽입니다.
깊이를 무엇으로 재느냐는 물음
짚어둘 게 있습니다.
이 이론에는 일찍부터 날카로운 비판이 따라붙었습니다. 깊은 처리를 무엇으로 재느냐는 문제입니다. 잘 기억되면 깊게 처리한 것이고, 깊게 처리했으니 잘 기억된다고 하면 말이 빙글빙글 돕니다. 깊이를 기억과 따로 떼어 잴 방법이 분명하지 않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또 1977년에 모리스, 브랜스퍼드, 프랭크스가 한 연구는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습니다. 나중에 운이 맞는 단어를 고르는 검사를 하면, 오히려 소리 질문으로 공부한 단어가 더 유리할 수 있다는 겁니다. 기억은 처리의 깊이만이 아니라 배울 때의 방식과 꺼낼 때의 방식이 얼마나 맞느냐에도 달려 있다는 얘기죠.
그러니 의미로 처리하면 늘 이긴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이론의 효과가 상황마다 얼마나 큰지도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이름을 들으면 뜻부터 붙여봅니다
그날 이후로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작은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름을 들으면 그냥 넘기지 않고 뜻을 하나 붙여봅니다. 한자를 모르면 비슷한 말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인상이나 방금 한 말과 이어 붙입니다. 서연이라는 분을 만나면 서재에서 연필을 쥔 모습을 떠올리는 식입니다.
억지스러워도 괜찮습니다. 깊이 처리한다는 건 결국 내가 아는 무언가와 연결 고리를 하나 만드는 일이니까요.
아이들 공부에도 비슷하게 해봅니다. 최근에 한글을 뗀 아들이 받아쓰기 단어를 외울 때, 글자 모양만 여러 번 쓰게 하는 대신 그 단어로 짧은 문장을 하나 지어보게 합니다. 딸아이에게는 사회 교과서 용어를 자기 말로 한 번 설명해보라고 하고요.
초두효과를 쓰면서 처음 들은 정보가 인상에 크게 남는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처음이든 나중이든 뜻을 붙여 들은 것이 오래 가는 건 비슷해 보입니다.
운동장에서 다시 만난 한결 씨
몇 주 뒤 학교 운동회에서 그 아버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저는 먼저 다가가서 한결 씨 오랜만이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분이 조금 놀라시더군요. 한 번 들은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냐고요. 한결같다는 말이 떠올라서요, 하고 웃었습니다.
그날 운동장에서 그분 아이와 제 딸아이가 같은 계주 조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둘이 바통을 주고받는 걸 나란히 서서 응원했습니다. 이름 하나를 기억한 덕분에 대화가 이어졌고, 대화가 이어지니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 더 늘었습니다.
나머지 분들의 이름은 여전히 가물가물합니다. 다음 모임 때는 한 분 한 분 뜻을 붙여볼 생각입니다. 이름 하나에 이야기 하나씩이요.
이 글은 기억에 관한 심리학 연구를 제 일상에 비춰본 개인적인 기록이며, 건망증이 심해져 생활에 불편이 크다면 전문가나 의료기관을 찾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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