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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배우 있잖아, 그 사람
저녁을 먹다가 아내가 주말에 본 옛날 영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극장에서 봤던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 주인공 누구였지? 그 사람 있잖아.”
얼굴은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목소리도, 영화 속에서 입고 나온 긴 코트도 기억났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안 나왔습니다.
“잠깐만, 알아. 진짜 아는데.”
이름이 세 글자였다는 건 확실했습니다. 성이 받침 없는 글자였던 것 같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이름이 몇 개 떠올랐는데 전부 아니었습니다. 떠오르는 이름들이 오히려 진짜 이름을 가로막는 느낌이었습니다.
딸이 휴대폰으로 찾아보면 되지 않냐고 했습니다. 저는 찾지 말라고 손을 저었습니다. 괜히 오기가 생겼거든요. 이건 제 머릿속에 분명히 있는 이름이었습니다.
아들까지 합세해서 아무 이름이나 불러댔습니다. 한글을 뗀 지 얼마 안 된 아들은 이런 게임이 재미있는 모양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날 저녁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도, 아이들을 재우면서도 이름이 목구멍 근처에 걸려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희귀한 단어의 뜻을 들려준 실험
이렇게 아는 걸 꺼내지 못하는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설단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혀끝에 있는 현상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도 혀끝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현상을 실험실에서 체계적으로 다룬 유명한 연구가 있습니다. 1966년에 심리학자 로저 브라운과 데이비드 맥닐이 발표한 연구입니다.
두 사람은 대학생들에게 잘 쓰지 않는 영어 단어의 뜻을 읽어줬습니다. 예를 들면 동아시아에서 쓰는 작은 나룻배를 가리키는 단어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그 단어가 무엇인지 떠올려보게 했습니다.
어떤 참가자들은 단어를 바로 떠올렸고, 어떤 참가자들은 아예 몰랐습니다. 연구자들이 관심을 둔 건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알 것 같은데 안 나오는, 바로 혀끝 상태에 빠진 사람들이요.
흥미롭게도 이 사람들은 단어를 떠올리지 못하면서도 그 단어에 대해 꽤 많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첫 글자가 무엇인지, 음절이 몇 개인지를 우연보다 잘 맞혔습니다. 소리가 비슷한 다른 단어들을 떠올리기도 했고요.
이름은 반쯤 열린 서랍에 있습니다
이 결과가 말해주는 건 기억이 전부 아니면 전무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단어는 한 덩어리로 저장된 게 아니라 뜻, 소리, 글자 모양 같은 여러 조각으로 이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설단 상태에서는 뜻과 일부 소리 정보는 꺼내지는데, 단어 전체의 소리로 가는 연결이 잠깐 막혀 있는 겁니다. 서랍이 반쯤 열려서 안에 뭐가 있는지는 보이는데 손이 닿지 않는 상태라고 할까요.
제가 그 배우 이름이 세 글자라는 것, 성에 받침이 없었다는 것까지 알았던 게 딱 그랬습니다. 얼굴과 영화와 코트는 다 꺼내졌는데, 이름의 소리만 걸려 있었습니다.
사람 이름이 특히 이런 일을 잘 겪는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사람 이름은 뜻과 소리 사이의 연결이 임의적이라 단서가 적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컵이라는 단어는 쓰임새와 연결되지만, 어떤 배우의 이름은 그 사람의 얼굴과 논리적으로 이어져 있지 않으니까요.
푸르스트 현상을 쓰면서 냄새 하나가 오래된 기억을 통째로 불러내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설단 현상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경험 같습니다. 기억은 거기 있는데 문을 열 열쇠 하나가 빠져 있는 거죠.
새벽의 기억이 설명해주지 않는 것
짚어둘 게 있습니다.
브라운과 맥닐의 연구는 설단 현상을 다룬 고전이지만, 실험실에서 희귀한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이 일상에서 사람 이름을 떠올리는 상황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도 주로 대학생들이었습니다. 정확한 참가자 수와 세부 수치는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새벽에 이름을 떠올린 경험을 두고 잠이 기억을 정리해줬다거나, 무의식이 밤새 답을 찾아줬다고 말하고 싶어지는데, 그렇게 단정할 근거는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떠올리려 애쓰던 긴장이 풀리면서 방해하던 비슷한 이름들이 물러났을 수도 있고, 그냥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또 나이가 들수록 설단 현상이 잦아진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건 대부분 정상적인 변화로 여겨집니다. 다만 단어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일이 갑자기 부쩍 늘거나 일상에 지장을 줄 정도라면 가볍게 넘기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맴도는 이름을 붙잡는 작은 요령
그날 이후 저는 이름이 혀끝에서 맴돌 때 몇 가지를 해봅니다.
우선 억지로 쥐어짜지 않습니다. 비슷한 이름이 계속 떠오르면 그게 진짜 이름을 가로막는 것 같아서, 차라리 잠깐 다른 일로 넘어갑니다.
대신 그 이름의 주변을 천천히 더듬습니다. 그 배우가 나온 다른 영화, 그 영화를 같이 본 친구, 극장 이름 같은 것들이요. 서랍 옆의 서랍부터 열어보는 셈입니다.
아이들과는 이걸 놀이처럼 합니다. 누가 이름을 까먹으면 첫 글자가 뭐였을 것 같은지, 몇 글자였는지를 같이 맞혀봅니다. 딸은 이 놀이를 꽤 좋아합니다. 아들은 아직 주로 엉뚱한 이름을 부르는 역할입니다.
자이가르닉 효과를 쓰면서 끝내지 못한 일이 머릿속에 계속 남는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떠오르지 않은 이름도 비슷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너무 오래 붙들고 있기보다 한 번 놓아주는 편이 저에게는 나았습니다.
냉장고 불빛 앞에서
새벽 세 시쯤 목이 말라서 부엌으로 나왔습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물병을 꺼내는데, 아무 맥락도 없이 그 이름이 떠올랐습니다.
너무 또렷해서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녁 내내 그렇게 찾아도 안 나오던 이름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 스스로 걸어 나왔습니다.
잊을까 봐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고 다시 잤습니다.
아침에 식탁에서 그 이름을 말했더니 아내가 한참 쳐다보다가 말했습니다. 맞다, 그 사람이라고요. 그러더니 이번엔 그 영화 감독 이름이 뭐였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마셨습니다. 그 이름은 오늘 새벽쯤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기억 인출에 관한 심리학 연구를 제 경험에 비춰본 개인적인 기록이며, 말이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 일이 잦아져 걱정된다면 전문가나 의료기관에서 확인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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