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반발, 옳은 말일수록 더 하기 싫었던 이유

심리적 반발 섬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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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에 아들이 소파에 누워 태블릿을 보고 있었습니다. 두 시간쯤 됐을 겁니다.

지나가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책 좀 읽어.”

아이가 화면에서 눈을 안 떼고 대답했습니다. “이따가.”

방으로 들어와 앉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방금 그 장면을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었거든요. 자리만 바뀌었을 뿐이었습니다.

제 말인데 어머니 목소리가 났습니다

열다섯 살 때 어머니가 저한테 그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책 좀 읽어라, 텔레비전 그만 봐라.

저는 그때마다 “알았어”라고 대답하고 안 읽었습니다. 그냥 안 읽은 게 아니라, 말을 들은 직후에는 더 안 읽었습니다. 어머니가 나가시고 나면 일부러 텔레비전을 십 분쯤 더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야 뭔가가 지켜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웃긴 건 저도 책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혼자 있을 때는 읽었습니다. 어머니가 말한 뒤에만 안 읽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습니다. 마침 읽으려고 책을 꺼내놨는데 그때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책 좀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꺼내둔 책을 도로 넣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데 그때는 그게 중요했습니다. 읽더라도 시켜서 읽는 건 아니어야 했거든요.

심리적 반발은 자유가 걸릴 때 생깁니다

이런 걸 심리적 반발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흔히 청개구리 심리라고 하는 그것입니다.

설명은 이렇습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을 스스로 정한다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누가 “이걸 해라” 또는 “저건 하지 마라”라고 하면 그 감각이 위협받습니다. 그러면 위협받은 자유를 되찾으려는 동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가장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시키는 것과 반대로 해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하나 있습니다. 이 반응은 시킨 내용이 옳은지 그른지와 별개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옳은 말이라고 반발이 줄지 않습니다. 반발의 대상은 내용이 아니라 지시받았다는 사실 자체니까요.

그래서 말을 강하게 할수록 반발도 커진다고 합니다. 부드럽게 권하면 자유가 덜 위협받는데, 단호하게 말하면 선택지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설득하려고 힘을 줄수록 반대 방향으로 밀리는 구조인 셈입니다.

같은 원리가 금지에도 적용됩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그 일이 오히려 눈에 들어옵니다. 못 하게 된 순간 그것이 잃어버린 선택지가 되고, 잃어버린 것은 원래보다 커 보이니까요. 광고나 캠페인에서 “절대 보지 마세요” 같은 문구를 쓰는 것도 이 반응을 노린 것이라고 합니다.

옳은 말이라 더 싫었습니다

이 설명을 읽고 열다섯 살을 다시 떠올려봤습니다.

어머니 말은 다 맞았습니다. 그게 문제였습니다. 틀린 말이면 반박하면 되는데, 맞는 말은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말로는 저항할 방법이 없어지고, 남는 건 행동뿐입니다. 그래서 “알았어”라고 대답하고 안 읽는 방식이 나온 겁니다. 대답으로는 지고 행동으로는 이기는 거죠.

지금 아들이 하는 “이따가”도 정확히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성의 없는 대답으로 들었는데, 사실은 제가 삼십 년 전에 쓰던 문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어머니가 왜 그렇게 자주 말씀하셨는지 이제 압니다. 안 하니까 또 말한 겁니다. 그런데 또 말하니까 더 안 했고요. 서로가 서로의 이유가 되는 고리였습니다.

이 고리에서 빠져나오려면 누군가 먼저 멈춰야 하는데, 열다섯 살이 먼저 멈추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멈출 수 있는 쪽은 어른입니다. 어머니는 그걸 못 하셨고, 저도 지금 잘 못하고 있습니다. 삼십 년이 지났는데 같은 자리에서 자리만 바꿔 앉은 셈입니다.

“하지 마”를 줄이고 나서

먼저 지시를 줄였습니다. 완전히 없앨 수는 없어서, 하루에 몇 번을 하고 있는지만 세어봤습니다. 이틀치를 세어보니 생각보다 많았습니다. 씻어라, 정리해라, 그만 봐라. 그중 정말 지금 해야 하는 건 절반도 안 됐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보기 불편해서 한 말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명령을 선택지로 바꿔봤습니다. “책 좀 읽어” 대신 “지금 읽을래, 저녁 먹고 읽을래”라고요. 유치한 방법 같은데 아이 반응이 달랐습니다. 어느 쪽을 고르든 결국 읽게 되는 건 같은데, 고르는 행위가 있고 없고가 차이를 만들더군요. 자유가 위협받지 않으면 반발할 이유도 없어지니까요.

다만 이건 남용하면 안 되겠더군요. 매번 두 개씩 내밀면 아이도 금방 눈치챕니다. 선택지가 형식이라는 걸 알아버리면 그때부터는 그것도 지시로 들립니다.

세 번째는 좀 어려웠습니다. 아무 말도 안 해보는 겁니다. 태블릿을 보고 있어도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처음 며칠은 제가 참는 게 힘들었지 아이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흘째인가, 아이가 알아서 태블릿을 놓고 다른 걸 하러 갔습니다. 제가 말했으면 십 분은 더 봤을 겁니다. 열다섯 살의 저처럼요.

반발을 줄이는 건 결국 제 몫이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안 하지는 못합니다. 늦었는데 안 씻고 있으면 결국 말하게 됩니다.

다만 말하기 전에 한 번은 묻게 됐습니다. 이게 지금 꼭 필요한 말인가, 아니면 내가 보기 불편해서 하는 말인가. 후자면 대체로 삼킵니다. 삼킨 만큼 아이가 저절로 하는 일이 조금씩 늘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아이한테만 쓰는 게 아니더군요. 회사에서 후배에게 뭘 시킬 때도, 아내에게 뭘 부탁할 때도 같은 구조가 있습니다. 정해서 던지면 반발이 붙고, 고르게 하면 안 붙습니다. 나이가 몇이든 자기가 정했다는 감각은 똑같이 중요한 모양입니다.

전에 제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아들이 물어봐서야 알았던 일을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도 비슷했습니다. 제 문제를 아이가 먼저 보여준 셈입니다. 아이가 “이따가”라고 하지 않았으면 저는 제 열다섯 살을 떠올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 글은 제가 겪은 일을 정리한 내용이며, 저는 심리상담사도 아동 전문가도 아닙니다. 아이마다 상황이 다르니 여기 나온 방법을 정답으로 삼지 마시고, 자녀와의 관계로 오래 힘드시다면 전문가와 상담해보시길 권합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