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조건, 아버지의 칠순 잔치에서 다시 떠올린 책

조지 베일런트 행복의 조건 섬네일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결국 사람이 남더라

아버지 칠순 잔치를 가족끼리 조촐하게 했습니다. 식당 방 하나를 빌려서 형제들과 조카들까지 모였습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누가 아버지께 한 말씀 하시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짧게 말했습니다.

“칠십 년 살아보니까, 결국 사람이 남더라.”

그게 다였습니다. 다들 박수를 쳤고요. 아버지는 쑥스러운지 바로 물잔을 드셨습니다.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그 말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일을 많이 한 분입니다. 성실했고, 이룬 것도 꽤 있습니다. 그런데 칠십에 남은 게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 책장에서 오래전에 읽은 『행복의 조건』을 꺼냈습니다. 같은 이야기가 들어 있었던 게 어렴풋이 기억났거든요.

수십 년을 따라간 사람들

조지 베일런트는 하버드 대학교의 성인 발달 연구를 오래 이끈 정신과 의사입니다.

이 연구는 1938년에 시작됐습니다. 하버드 2학년생 가운데 건강하고 유망해 보이는 남학생 이백여 명을 골라, 그들이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계속 추적한 겁니다. 정기적으로 설문을 하고, 면담을 하고, 건강 기록을 모았습니다.

베일런트는 이 자료에 다른 두 연구를 더했습니다. 보스턴 도심의 가난한 동네에서 자란 남성들을 추적한 연구, 그리고 어릴 때 영재로 선발된 여성들을 추적한 연구입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든 살에 건강하고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쉰 살 무렵에 무엇이 달랐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수십 년 따라간 자료라서, 다른 연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것들이 보였습니다.

예상이 빗나간 조건들

제가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놀랐던 건 중요하지 않았던 것들의 목록이었습니다.

부모의 사회적 계층이나 어린 시절의 기질, 조상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같은 것들이 여든의 삶을 예측하는 힘은 생각보다 약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것들이 꽤 결정적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쉰 살 때 잰 콜레스테롤 수치도 그 목록에 들어 있었습니다. 건강검진 때마다 신경 쓰는 숫자라 좀 의외였습니다. 물론 이건 그 연구의 대상자들 안에서 여든 무렵의 삶을 얼마나 가르느냐를 본 것이지, 그 숫자가 건강에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예측력이 있었던 건 대부분 쉰 무렵까지 자기가 선택하고 쌓아온 것들이었습니다.

책은 건강 습관과 관련된 몇 가지와 함께 교육, 안정된 관계, 그리고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을 꼽습니다.

아버지 말씀과 제일 가까운 건 관계 쪽이었습니다. 따뜻하고 오래가는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도 더 건강하고 만족스러웠다는 겁니다. 베일런트는 나중에 쓴 다른 책에서 이 연구 전체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결국 사랑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성숙한 방어라는 말

책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들었던 건 어려움에 대처하는 방식입니다. 베일런트는 이걸 방어기제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사람은 힘든 일을 겪으면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지키는 방식을 씁니다. 그 방식에도 수준이 있다는 게 그의 생각입니다. 남 탓을 하거나 현실을 부정하는 쪽이 있고, 힘든 걸 유머로 풀거나 다른 사람을 돕는 일로 돌리는 쪽이 있습니다.

그가 성숙한 방어라고 부른 뒤쪽을 주로 쓰는 사람들이 나이 들어서 더 잘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건 나이가 들면서 바뀔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젊을 때 미성숙한 방식을 쓰던 사람이 중년을 지나며 성숙한 쪽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겁니다.

방어기제를 쓰면서 사람이 불안을 다루는 여러 방식을 다뤘는데, 이 책은 그 방식들이 수십 년 뒤의 삶에까지 이어진다는 걸 보여준 쪽입니다.

아버지를 생각해보면 힘든 일이 있을 때 농담을 먼저 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그게 가볍게 느껴졌는데, 지금 보니 그게 버티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연구를 읽을 때의 조심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짚어둘 게 있습니다.

이 연구의 중심은 한 대학의 백인 남성들이었습니다. 시작 당시 그 대학이 그랬으니까요. 다른 두 집단을 더했지만, 오늘날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이 결과가 얼마나 들어맞는지는 조심해서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건 관찰 연구입니다. 좋은 관계를 가진 사람이 더 건강했다는 건 보여줘도, 관계가 건강을 만든 건지 건강한 사람이 관계를 잘 유지한 건지는 가르기 어렵습니다.

방어기제를 평가하는 방식에도 비판이 있습니다. 면담 기록을 보고 연구자가 판단하는 방식이라 주관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을 행복의 공식으로 읽지 않습니다. 오래 산 사람들의 삶에서 반복해서 보인 흔적 정도로 읽습니다. 그 정도로도 무게가 충분했습니다.

쉰까지 쌓을 수 있는 것

이 책을 다시 읽고 제가 붙든 건 쉰이라는 나이입니다. 저는 아직 거기까지 시간이 좀 있습니다.

베일런트의 말대로라면 지금부터 쉰까지 제가 쌓는 것들이 여든의 저를 꽤 많이 정합니다. 타고난 것보다는요.

그래서 요즘 조금 신경 쓰는 게 있습니다. 연락이 뜸해진 사람들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것. 큰 용건 없이요. 일에 밀려서 미뤄뒀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제가 어떤 방식으로 버티는지를 가끔 봅니다. 남 탓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조금 떨어져서 웃을 여유가 있는지요.

회복 탄력성을 쓰면서 다시 일어서는 힘을 다뤘는데, 이 책은 그 힘이 수십 년에 걸쳐 어떤 차이를 만드는지를 보여준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칠순 잔치 다음 주에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딱히 용건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슨 일 있냐고 먼저 물으셨습니다. 그냥 했다고 하니 조금 어색해하셨고요.

그래도 통화가 평소보다 길었습니다. 잔치 때 온 조카 이야기, 요즘 다니시는 산책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끊고 나서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말한 사람이 남는다는 게 이런 것들이 쌓인 결과였겠구나 하고요. 큰일이 아니라 이런 통화 같은 것들이요.

저도 칠십에 그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지금부터 쌓아봐야 알겠죠.

이 글은 종단 연구를 다룬 책을 읽고 가족의 일에 비춰본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건강이나 노화에 관한 판단은 이 글이 아니라 의료 전문가의 조언을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