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제 요청은 대부분 강요였습니다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 섬네일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이것까지 말해야 알아?”

이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였는지는 기억나는데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그 정도로 사소한 일이었다는 뜻일 겁니다.

말하고 나서 분위기가 식었고, 저는 됐다고 하고 제가 해버렸습니다. 그날은 그걸로 끝났습니다. 큰 소리가 오간 것도 아니어서 다툼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일이었습니다.

박재연의 「나는 왜 네 말이 힘들까」를 읽으면서 그 장면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정확히는 그날 제가 한 것이 부탁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화술이 아니라 관계를 다루는 책입니다

제목만 보면 말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 같지만 결이 다릅니다.

이 책이 먼저 묻는 것은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말을 들었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입니다. 같은 문장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가고 어떤 사람은 며칠을 붙들고 있는데,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앞부분에서 다룹니다.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그 생각이 만들어내는 해석을 짚고, 그 아래 깔린 신념까지 내려갑니다.

그다음에 나오는 것이 연결의 대화입니다. 관찰과 감정, 욕구와 요청을 나눠서 보는 방식인데, 뿌리는 마셜 로젠버그가 정리한 비폭력대화에 닿아 있습니다. 그쪽에서도 관찰, 느낌, 욕구, 요청을 네 요소로 둡니다. 저자는 이 틀을 오래 워크숍으로 다루면서 한국의 관계 상황에 맞게 옮겨온 셈입니다.

개정증보판에는 직장과 가족, 연인 관계의 사례가 보강되고 자기 대화 습관을 점검하는 진단 항목이 새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진단부터 먼저 해봤습니다.

요청과 강요를 가르는 자리

책에서 제일 오래 남은 것은 요청과 강요를 나누는 기준이었습니다. 이 구분 하나로 지난 몇 달치 대화가 다시 정리됐습니다.

말의 형태로는 둘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것 좀 해줄 수 있어?”는 문장만 보면 부탁입니다. 그런데 이 틀에서는 문장이 아니라 그다음을 봅니다.

상대가 거절했을 때 그 거절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요청입니다. 거절하는 순간 상대를 비난하거나, 서운함을 티 내거나, 미안하게 만든다면 사실상 강요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판정은 말한 시점이 아니라 거절당한 시점에 이뤄집니다. 부탁을 하는 동안에는 자기가 요청을 하는지 강요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폭력대화 쪽에서도 같은 갈래로 봅니다. 강요에는 따르지 않았을 때의 대가가 붙어 있고 요청에는 붙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대가가 꼭 큰 것일 필요는 없습니다. 표정이 굳는 것도 대가고, 그날 저녁 내내 말수가 줄어드는 것도 대가입니다. 명시적으로 협박할 필요가 없다는 게 오히려 까다로운 지점입니다. 대가를 붙인 쪽은 자기가 붙인 줄 모르고, 받은 쪽은 정확히 압니다.

제 부탁이 요청이었는지 재봤습니다

여기서 제가 걸렸습니다.

“이것까지 말해야 알아?”라는 문장은 부탁이 아닙니다. 애초에 요청 자리에 놓인 말도 아니고요. 다만 그날 제가 한 일 전체를 놓고 보면 구조가 분명합니다. 저는 무언가를 바랐고, 그것이 안 됐고, 그다음에 상대가 불편해질 말을 했습니다.

문제는 그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그 기준을 들고 지난 몇 달을 훑어보니, 제가 한 부탁 중 상당수가 같은 모양이었습니다. 말은 부탁으로 하고, 안 되면 됐다고 하고, 그 됐다는 말에 서운함을 실어 보냈습니다.

됐다는 말이 제일 곤란합니다. 형식은 물러서는 것인데 내용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상대는 거절했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게 됩니다. 거절할 수 있는 자리를 준 것처럼 해놓고 실제로는 안 준 겁니다.

심리적 반발을 쓰면서 옳은 말일수록 하기 싫어지는 마음을 다뤘는데, 여기서 이어집니다. 제 말이 옳았느냐와 상대가 그 말을 따를 수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였습니다.

판단이 아니라 본 것을 말하는 연습

책이 제안하는 방식은 순서를 바꾸는 것에 가깝습니다.

상대를 규정하는 말 대신 내가 본 것과 느낀 것을 말하는 쪽입니다. 늘 그런다거나 왜 그것밖에 못 하느냐는 말에는 상대라는 사람 전체에 대한 판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말이 나오면 상대는 내용에 답하는 대신 자기를 방어하게 되고, 처음에 있었던 작은 문제는 사라집니다.

아이가 아빠는 왜 화내냐고 물었을 때를 쓰면서도 비슷한 걸 봤습니다. 제가 화를 낸 대상은 그 순간의 행동이었는데, 아이에게 도착한 것은 아빠가 나에게 화가 났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행동과 사람을 나누는 일이 말하는 쪽에서는 쉬운데 듣는 쪽에서는 어렵습니다.

동의하기 어려운 지점도 있었습니다

읽으면서 걸린 대목을 적어둡니다.

이 방식은 양쪽이 같은 언어를 쓸 때 가장 잘 작동합니다. 한쪽만 쓰면 비대칭이 생깁니다. 상대는 계속 판단으로 말하는데 저만 관찰과 감정으로 말하면, 저는 계속 흡수하는 자리에 서게 됩니다. 책도 무례한 말과 폭력적인 말은 구분해야 한다고 짚기는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그 선을 긋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먼저 보라는 조언도 그렇습니다. 대체로 맞는 말인데, 방향을 잘못 잡으면 상대의 문제까지 내 반응 문제로 옮겨오게 됩니다. 상처를 받은 사람이 왜 상처받았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자리로 밀리는 것이요.

책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종류의 접근이 실제로 그렇게 쓰이는 경우를 본 적이 있어서, 그 위험은 적어두는 편이 맞겠다 싶었습니다.

문장을 고치기 전에 그다음을 보기로 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제가 바꾸려는 건 말투가 아닙니다.

말투를 고치는 건 생각보다 쉽습니다. “해줄 수 있어?”라고 묻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어려운 건 그다음입니다. 안 된다는 답을 들었을 때 제 표정과 그날 저녁이요.

그래서 요즘은 부탁을 하기 전에 하나만 확인합니다. 지금 이 사람이 안 된다고 했을 때 내가 진짜 괜찮을 것인가. 안 괜찮을 것 같으면 그건 부탁이 아니니, 차라리 필요한 것을 분명히 말하는 쪽이 낫습니다.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하면서 부탁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그편이 서로 덜 헷갈립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이 글은 책을 읽고 제 생각을 정리한 기록이며, 진단이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김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