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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배드민턴 해볼래
딸이 피아노를 한 해쯤 배웠습니다. 그러다 재미없다고 해서 그만두고 미술 학원을 반년 다녔습니다.
얼마 전 저녁에 딸이 또 말했습니다.
“아빠, 이번엔 배드민턴 해볼래.”
그 말을 듣고 좀 복잡했습니다. 하나를 끝까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주변 이야기도 신경 쓰였습니다. 학부모 모임에서 한 분이 아이는 어릴 때 하나를 정해서 꾸준히 시켜야 뭐라도 된다고 했거든요. 그 집 아이는 다섯 살부터 바이올린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들으며 자랐고요. 그런데 딸을 억지로 피아노 앞에 앉혀놓는 게 맞는지도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즈음 서점에서 이 책의 제목을 봤습니다. 늦깎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눈에 걸렸습니다.
타이거 우즈와 로저 페더러
데이비드 엡스타인은 책을 두 운동선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한 명은 타이거 우즈입니다. 두 살도 안 됐을 때 골프채를 잡았고, 아버지의 체계적인 훈련 아래 한 길로만 걸었습니다. 일찍 시작해서 깊게 판 사람의 상징 같은 존재입니다.
다른 한 명은 로저 페더러입니다. 그는 어릴 때 스키, 레슬링, 수영, 농구, 탁구, 축구 같은 여러 운동을 두루 했습니다. 테니스에 집중한 건 또래들보다 늦었다고 합니다. 부모도 테니스만 하라고 밀어붙이지 않았고요.
두 사람 다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공담으로 기억하는 건 대개 우즈 쪽 이야기라는 게 엡스타인의 지적입니다. 페더러 쪽 경로는 덜 이야기된다고요.
엡스타인은 많은 분야에서 오히려 페더러 쪽이 더 흔한 경로라고 주장합니다. 처음에 여러 가지를 해보는 시기가 있고, 그 뒤에 자기한테 맞는 걸 찾아 깊이 들어가는 방식이요.
친절한 환경과 사악한 환경
책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든 건 환경의 구분입니다. 엡스타인은 심리학자 로빈 호가스의 개념을 빌려옵니다.
친절한 학습 환경이 있습니다. 규칙이 분명하고,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바로 알 수 있는 환경입니다. 골프나 체스가 여기에 가깝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일찍 시작해서 반복 연습하는 게 확실히 유리합니다.
사악한 학습 환경도 있습니다. 규칙이 불분명하고, 상황이 계속 바뀌고, 잘했는지 알 수 있는 피드백이 늦거나 잘못 오는 환경입니다. 삶의 많은 영역이 여기에 속한다고 엡스타인은 봅니다.
이런 곳에서는 한 가지만 깊게 파는 것보다, 여러 경험에서 얻은 다양한 시각이 더 쓸모 있다는 겁니다. 처음 보는 문제를 만났을 때 다른 분야의 방식을 가져다 쓸 수 있으니까요.
책에는 과학자들 이야기도 나옵니다.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을 다른 과학자들과 비교한 연구에서, 수상자들이 음악이나 미술, 글쓰기 같은 취미를 가진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았다는 겁니다. 엡스타인은 이걸 다른 영역에서 얻은 생각이 본업에 흘러들어간 흔적으로 읽습니다.
물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취미도 많고 성과도 낸 것일 수 있어서, 이 연구만으로 취미가 성과를 만들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우즈의 방식이 틀린 게 아니라, 골프라는 환경에 잘 맞았던 겁니다. 모든 분야가 골프 같지는 않다는 거고요.
초심자의 행운을 쓰면서 처음 해본 일이 잘 풀리는 경험을 다뤘는데, 여러 가지를 해보는 시기는 그런 첫 경험을 여러 번 가져볼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놓치는 쪽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짚어둘 게 있습니다.
이 책도 사례가 많고 이야기가 강합니다. 페더러처럼 늦게 시작해 성공한 사람들을 모으면 설득력이 생기지만, 늦게 시작했다가 중간에 흐지부지된 사람들은 책에 나오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만 보면 어떤 경로든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엡스타인이 전문화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친절한 환경에서는 일찍 깊게 파는 게 여전히 유리하다고 분명히 씁니다. 책의 주장은 모든 분야가 그렇지는 않다는 쪽입니다. 그런데 책의 인상은 전문화를 반대하는 쪽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또 탐색하는 시기를 거친다는 건 계속 그만둔다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를 해보더라도 각각을 어느 정도는 경험해봐야 뭐가 맞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기준이 얼마인지는 책도 딱 정해주지 않고, 저도 모르겠습니다.
더닝 크루거 효과를 쓰면서 잘 모를수록 자신이 과대평가된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너무 일찍 그만두면 그 분야를 제대로 알기 전에 판단하는 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만두는 것과 넘어가는 것
이 책을 읽고 딸과의 대화가 조금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그만두겠다고 하면 조금만 더 해보라고 했습니다. 이유를 듣기 전에요.
이제는 먼저 묻습니다. 그거 하면서 뭐가 재밌었어? 그리고 뭐가 싫었어?
딸은 피아노에서 악보 보는 게 싫었다고 했습니다. 소리 내는 건 좋았고요. 미술에서는 혼자 오래 앉아 있는 게 싫었다고 했습니다. 색 섞는 건 좋았다고요.
그러니까 딸은 그냥 그만둔 게 아니라, 뭔가를 알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몸을 움직이는 게 좋고, 혼자보다 누구랑 같이 하는 게 좋다는 것. 배드민턴이 그 두 가지에 맞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규칙을 하나 정했습니다. 새로 시작하면 한 학기는 해본다. 그리고 그만둘 때는 뭘 알게 됐는지 한 줄 적어둔다. 그만두는 게 아니라 다음으로 넘어가는 걸로 만들려고요.
셔틀콕이 날아다니는 저녁
딸은 요즘 배드민턴 수업을 다니고 있습니다. 벌써 두 달째입니다.
어제는 저녁 먹고 아파트 앞에서 저랑 셔틀콕을 주고받았습니다. 딸이 저보다 잘 칩니다. 두 달 만에 이렇게 늘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계속 헛스윙만 했고요.
이것도 언젠가 그만둘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때 또 뭘 알게 됐는지 물어볼 생각입니다.
다섯 살부터 바이올린을 한 그 집 아이도 잘하고 있을 겁니다. 그 길이 맞는 아이도 있으니까요.
다만 딸의 길은 좀 구불구불할 것 같습니다. 그게 늦깎이가 되는 길인지, 그냥 구불구불한 길인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책을 읽고 아이의 활동을 바라보는 제 생각을 정리한 것이며, 아이의 진로나 교육 방식은 아이의 특성에 따라 다르니 필요하면 교육 전문가와 상의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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