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아들러를 두 번째로 읽었습니다
작년에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 책이 아들러의 사상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낸 해설서였다면, 이번에 읽은 「우월한 열등감」은 아들러 본인이 쓴 글을 옮긴 책입니다.
순서가 거꾸로였던 셈입니다. 해설을 먼저 읽고 원전을 나중에 읽었으니까요.
그래서 읽는 내내 예전에 제가 쓴 글이 자꾸 겹쳤습니다. 해설서로 만든 인상 위에 원전이 얹히니 어떤 대목은 더 선명해지고 어떤 대목은 어긋났습니다.
다 읽고 나서 그 글을 열어봤는데, 고쳐야 할 곳이 있었습니다. 틀린 사실을 적은 건 아니었지만 반박을 엉뚱한 데 하고 있었습니다.
열등감은 없애야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목부터 걸립니다. 우월한 열등감이라니, 앞뒤가 안 맞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아들러의 체계에서는 이게 모순이 아닙니다.
아들러는 열등감을 병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본 열등감은 모든 사람이 겪는 출발 조건입니다. 아이는 어른들 사이에서 자기가 작고 약하다는 걸 알아차리며 자랍니다. 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다음입니다. 그 부족한 느낌이 사람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채우려 하고, 그래서 배우고 연습하고 나아집니다. 아들러는 이 과정을 인간이 성장하는 기본 동력으로 봤습니다. 열등감이 없었다면 아무도 무엇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열등감을 없애야 한다”는 흔한 조언은 아들러의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제목이 우월한 열등감인 이유도 여기 있을 겁니다. 열등감이 우월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월해지려는 움직임 자체가 열등감에서 출발한다는 쪽이요.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던 제목이 읽고 나니 요약이었습니다.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는 다릅니다
그럼 문제가 되는 건 무엇이냐. 아들러는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를 나눴습니다.
열등감은 부족함을 느끼고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열등 콤플렉스는 그 느낌에 붙들려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부족하다는 감각이 시작점이 되지 못하고 변명이 되는 자리요.
셀프 핸디캐핑을 쓰면서 실패했을 때 쓸 변명을 미리 만들어두던 습관을 다뤘는데, 아들러의 구분을 놓고 보니 그게 딱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저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채우는 쪽이 아니라 피하는 쪽으로 썼던 겁니다.
같은 감정에서 갈라진 두 갈래인데, 결과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리고 갈림길이 어디인지도 비교적 분명합니다. 부족하다고 느낀 뒤에 무언가를 해보는가, 아니면 그 느낌을 이유 삼아 안 하는가. 감정의 크기가 아니라 그다음 행동이 둘을 가릅니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 대한 제 반박을 다시 봤습니다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쓴 글에서 저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모든 고민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는 문장에서 “모든”이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요. 혼자 있을 때 드는 막막함이나 몸이 힘들 때의 무기력까지 인간관계로 묶는 건 과하다고 봤습니다.
이번에 원전을 읽고 그 반박을 다시 봤습니다.
아들러는 사람이 풀어야 할 과제를 셋으로 정리했습니다. 친구를 사귀고 사람들과 지내는 문제, 일하며 사회에서 자기 역할을 갖는 문제, 그리고 사랑과 결혼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셋을 늘어놓고 보면 전부 다른 사람이 있어야 성립하는 과제입니다.
즉 아들러가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라고 할 때, 그건 세상 모든 어려움을 관계 탓으로 돌린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체계에서 다루는 과제 자체가 애초에 사람 사이의 일로 정의되어 있었던 겁니다.
제 반박은 그 정의를 모르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주장한 적 없는 것을 반박한 셈입니다.
이런 일이 해설서만 읽고 넘어갈 때 생기는 것 같습니다. 문장은 정확히 옮겨졌는데 그 문장이 놓인 자리가 빠지니, 저는 그걸 세상 전체에 대한 주장으로 읽었습니다.
그래도 동의하지 못하는 지점은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제 생각이 다 뒤집힌 건 아닙니다.
아들러는 개인심리학에서 옳은 것은 공동체에 유익한 것이어야 한다고 봤고, 아이가 잘 자라고 있는지 판단할 때 사회적 감정을 가장 결정적인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여전히 마음에 걸립니다. 공동체에 유익한지를 기준으로 삼으면, 그 공동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판단할 자리가 없어집니다. 혼자 남아 있는 사람의 선택이 옳을 때도 있는데 그건 어디에 놓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들러가 이 문제를 몰랐을 리 없고, 제가 책 한 권으로 그의 체계 전체를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기와 지금은 공동체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도 다를 겁니다.
다만 읽으면서 걸린 것은 걸린 대로 적어둡니다. 앞의 반박은 제가 틀렸던 것이고 이건 아직 모르겠는 것인데, 둘을 섞지 않는 편이 나중에 다시 읽을 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역자의 문장으로 제 글을 재봤습니다
이 책 역자의 말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좋은 심리학은 사람을 너그럽게 만듭니다.
읽고 나서 제 글 목록을 한 번 훑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아흔 편 가까이 심리학 개념으로 글을 써왔는데, 그 글들이 저를 너그럽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사람을 분류하는 데 더 익숙하게 만들었는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효과와 편향의 이름을 알고 나면 편해지는 대신 판정이 빨라집니다. 저 사람은 무슨 효과에 걸린 거라고 붙이는 순간 그 사람을 더 안 보게 됩니다. 이름이 관찰을 대신해버리는 겁니다. 아들러가 열등감을 두고 경계한 것도 결국 그런 정지 상태였고요.
역자가 이어서 쓴 말이 그 답에 가까웠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힘은 완벽함이 아니라 알아차림이라는 것. 알아차림은 판정이 아니라 관찰에 가깝습니다.
다음 글부터는 이름을 붙이는 데 한 문장 덜 쓰고, 그 자리에 관찰을 한 문장 더 넣어보려 합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이 글은 책을 읽고 제 생각을 정리한 기록이며, 진단이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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