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격차, 배부를 때 세운 계획은 배고플 때 무너집니다

공감 격차
좋은 정보는 함께 나눠요

밤 열한 시의 나와 아침 일곱 시의 나

밤에 계획을 세우는 일이 있습니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무엇을 하겠다는 식입니다.

그 시간의 저는 꽤 그럴듯합니다. 하루가 끝나서 마음이 정리돼 있고, 내일이 아직 안 왔으니 부담도 없습니다. 여섯 시 반이면 충분하겠다 싶습니다.

아침 일곱 시의 저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 계획을 세운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고, 알았다 해도 동의가 안 됩니다. 몸이 무겁고 판단이 다릅니다.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서로를 잘 모릅니다. 밤의 저는 아침의 저를 만나본 적이 없는 것처럼 굽니다. 매번 그러면서도 매번 또 그럽니다.

공감 격차, 지금 상태가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 어긋남을 다루는 개념이 공감 격차입니다. 조지 로웬스타인이 정리한 표현으로, 지금 내 상태와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의 판단을 제대로 그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배고픔이나 갈증, 피로, 통증, 화 같은 것들입니다. 몸에서 올라와 판단을 흔드는 것들이요. 이런 것이 올라와 있는 상태를 뜨거운 상태, 가라앉아 있는 상태를 차가운 상태라고 부릅니다.

핵심은 두 상태가 서로를 잘 못 본다는 점입니다. 차가울 때는 뜨거울 때의 내가 얼마나 흔들릴지를 낮게 잡습니다. 뜨거울 때는 차가울 때의 내가 세운 계획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 격차는 남을 볼 때도 작동합니다. 로웬스타인과 리프 반 보븐이 2003년에 다룬 실험이 그 예입니다. 참가자들을 서로 다른 조건에 두어 어떤 사람은 목이 마르게 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게 한 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목말라할지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남들도 목마를 거라고 봤고, 목마르지 않은 사람은 남들도 괜찮을 거라고 봤습니다. 자기 몸 상태가 남에 대한 판단으로 그대로 넘어간 셈입니다.

로웬스타인은 이 격차를 방향으로도 나눴습니다. 차가운 데서 뜨거운 쪽을 볼 때와 뜨거운 데서 차가운 쪽을 볼 때가 다르고, 앞으로의 나를 볼 때와 지난 나를 볼 때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나인지 남인지에 따라 또 갈립니다. 이렇게 갈래를 나눠놓고 보면 일상에서 이 격차가 안 끼는 자리가 드뭅니다.

특히 곤란한 쪽은 지난 나를 볼 때입니다. 그때 왜 그랬는지가 지금은 이해가 안 됩니다. 그 순간의 상태가 지금 없으니 판단의 근거도 같이 사라진 것인데, 남는 것은 결과와 그 결과를 만든 사람뿐입니다. 그래서 지난 나를 실제보다 더 어리석게 기억하게 됩니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짚어둘 것이 있습니다. 아침에 못 일어난 것을 의지가 약해서라고 정리하면 다음번에도 같은 일이 생깁니다.

밤의 저는 의지가 강했던 게 아니라 상태가 편했던 겁니다. 편한 상태에서는 어려운 일도 어렵지 않게 보입니다. 그러니 그때 세운 계획은 어려운 일을 가볍게 잡아둔 계획이 됩니다.

계획 오류를 쓰면서 사람들이 자기 일에 걸리는 시간을 꾸준히 짧게 잡는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공감 격차는 그 옆에 놓입니다. 계획 오류가 시간을 짧게 잡는 것이라면, 이쪽은 그 시간을 견딜 나를 너무 튼튼하게 잡는 것입니다.

정서 예측 오류와도 이어집니다. 그쪽은 미래의 감정 크기를 잘못 재는 이야기였고, 이쪽은 재는 사람의 상태가 자를 바꿔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공감 격차는 사람 사이에서도 벌어집니다

혼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격차는 다른 사람을 볼 때 더 자주 문제가 됩니다.

지금 화가 나 있지 않은 사람은 화가 난 사람의 판단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 정도 일로 왜 그러느냐는 말이 거기서 나옵니다. 반대로 화가 나 있는 사람은 차분한 사람이 왜 저렇게 남 일처럼 구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둘 다 상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서로 다른 상태에서 같은 일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의 자를 빌릴 방법이 없다는 게 곤란한 지점입니다.

아이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배고프고 졸린 아이가 사소한 일에 무너질 때, 그걸 보는 어른은 대개 배부르고 안 졸립니다. 같은 일을 두고 두 사람의 크기가 다릅니다. 어른 쪽에서는 별일 아닌데 왜 저러느냐는 말이 나오는데, 아이 쪽에서는 그게 별일이 맞습니다.

이럴 때 설득이 잘 안 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상대를 설득하려면 상대 쪽 크기를 알아야 하는데, 제 상태가 제 자를 정하고 있으니 그 크기가 안 잡힙니다. 그래서 대화가 내용이 아니라 크기를 두고 어긋납니다. 별일이라는 사람과 별일 아니라는 사람이 각자 자기 자를 들고 서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규칙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 격차는 마음먹는다고 줄지 않습니다. 다른 상태의 나를 상상해서 메우는 방식은 잘 안 됐습니다.

그래서 상상 대신 규칙을 하나 두기로 했습니다. 상태가 바뀌면 결정을 다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밤에 정한 기상 시간을 아침에 다시 협상하지 않습니다. 아침의 제가 판단할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의 제 판단이 상태에 심하게 흔들린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대신 밤에 정할 때 아침 몫을 미리 깎아둡니다. 여섯 시 반이 아니라 일곱 시로요.

장을 볼 때도 같은 규칙을 씁니다. 목록은 배부를 때 적고, 살 때는 목록만 봅니다. 배고픈 상태에서 새로 판단하지 않는 것이 요령입니다. 목록에 없는 게 눈에 들어오면 그건 제 판단이 아니라 지금 제 상태가 고른 것으로 칩니다.

화가 났을 때 답장을 미루는 것도 같은 규칙입니다. 그 순간에 쓴 문장이 틀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몇 시간 뒤의 제가 그 문장을 보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면, 보내는 결정을 그쪽에 맡기는 편이 낫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사는 셈 치기로 했습니다

결론은 소박합니다. 밤의 저와 아침의 저를 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밤의 저는 계획을 잘 세우고 실행은 못 합니다. 아침의 저는 실행은 하는데 계획은 못 세웁니다. 둘 다 자기 몫이 있고 서로 잘 모릅니다.

그래서 밤의 제가 할 일은 좋은 계획을 세우는 게 아니라, 아침의 제가 따라올 수 있는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그 사람을 설득할 수는 없으니 애초에 무리한 것을 안 넘기는 쪽이 낫습니다.

저는 심리상담사도 임상심리사도 아닙니다. 이 글은 심리학 개념을 참고해 제 경험을 정리한 기록이며, 진단이나 상담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김선진